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2001년 '현대시 작품상' 심사평 본문

심사평, 추천사 등

2001년 '현대시 작품상'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10. 18:07

본심에 올라 온 시들이 저마다 한국시의 일각을 빛내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확인이 될 것이다. 각자의 영역을 얼마나 더 예리하게 벼릴 것인가 혹은 취향의 담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의 지형을 구축하느냐는 시인들이 시에 저의 몸을 밥으로 준 정도에 따를 것이다. 이원의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모니터, 캔산소, 거울, 채호기의 수련, 수련의 비밀, 최승호의 , 죽음이 흘리는 농담, 함성호의 나비의 집, 대포항 방파제를 눈여겨보았다. 날씬한 미녀가 가까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원 시의 밑바닥에는 오규원의 강력한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오규원이 사물의 감각적 이미지를 관념 혹은 관념적 사회와의 싸움 쪽으로 끌고 갔던 데 비해 이원은 사물 그 자체의 혼잡으로 판을 바꾸어나간다. 사물들은 단단한 정체성을 고수한 채로 뻗고 엉키면서 더러워지고 너절해지며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이원의 작업은 현대사회의 입자적 연결망(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기묘한 결합)에 대한 가장 감각적인 반영이자 동시에 섬뜩한 경고이다. 채호기는 사물과 관념과 언어 사이의 어긋남과 접촉에 관한 전혀 새로운 비망록을 적는다. 그의 기호학은 퍼스적이 아니라 소쉬르적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사물과 관념은 하나이며 그 통합체가 언어와 길항한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사물(현실)과 관념(이데올로기) 사이의 싸움이라는 종래의 대립 구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탈출의 사회적 의의는 관념과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혹은 징그럽게 공모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 가장 불편한 이물질로 그의 시가 존재한다는 데에 있으며, 그것의 실천적 의미는 언어를 가장 낯선 상태로 끌고 감으로써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실험한다는 데에 있다. 채호기의 시가 잘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상이 납득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시의 수용면의 편협함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이기에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최승호는 기왕의 자기 세계를 집요하게 되풀이하고 있다. 치욕 덩어리로서의 산-죽음의 세상을 조명해 온 시인은 수년 전부터 생존의 윤리학을 집어넣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 그의 시의 요체는 그러니까 극단의 죽음(상황)과 극단의 생(포즈) 사이의 팽팽한, 그리고 약간 엇 비켜선 대치이다. 그 대치 사이의 밀도는 높다. 함성호는 분명 정서적 전위이며 그 점에서 그는, 생물학적 나이에 관계없이 가장 젊은 시인이다. 그가 정서적 전위라는 것은 그의 시가 언어와 이미지와 관념을 하나로 뭉친 다이나마이트가 되어 생의 한 가운데로 달려 가 폭발하려 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만 지금 그는 뇌관을 잃어 버렸다. 진공의 벽에 막혀 한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는 압력에 짓눌려 있다. 그 상황의 표상이 풍경 밖의 나비이다. 그러나 그 나비가 꿈꾸는 폭약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는 온 몸으로 거기까지 간 것이다. 달려가다가 굴러가다가 기어가다가 그렇게 새하얗게 말라 비틀어진 것이다.

함성호의 시가 당선작으로 결정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나는 한국시의 주요한 상들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겉으로는 분별없이 요란한데 속으로는 습성이 아주 끈질긴 사회이며 그것은 바람직한 게 아니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