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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확실히 생명복제의 시대이다. 지난번에 숙제가 너무 많다고 비명을 질렀더니, 실무팀 쪽에서 재빨리 클론 두 분을 붙여주었다. 덕분에 문학 부문을 둘로 나누고 첫 회 선정자들이 각자 신임 위원 하나씩 꿰차고(?) 딴 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신참자의 개성이 어찌나 강한 지, 이번의 선정에는 신임 위원의 의견이 100% 관철되었다. 선정의 안목이 높아졌다면 그것은 출판인회의의 공이고 선정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신임위원의 탓이다. 면책한 구닥다리는 그저 양측에 감사드리는 바이다. 이번에 특기할만한 점은 좋은 외국 소설이 많았다는 것. 그러나, 정작 선정된 것은 2종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선정자들의 한국문학에 대한 집착이 광기의 수준에 다다랐기 때문이 아니라, 번역에서 나름의 문제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일테..
투고된 글은 두 편밖에 안되었지만 모두 대학생다운 패기와 참신성을 엿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현실 세계와 문학적 대결」은 윤동주의 시를 저항시로 볼 것인가, 순수 서정시로 볼 것인가하는 해묵은 논쟁에 정면으로 육박한 글이다. 그 논쟁 자체는 무의미한 것인데, 왜냐하면, 어떠한 저항시도 그것이 시인 한은 서정적인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서정시는 그것이 사회적 행위인 한은 현실을 향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 논쟁은 서로 다른 범주의 개념들을 억지로 견준 잘못된 논쟁이라 할 수 있으며,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특이한 방식으로 결합되는 모습, 즉 윤동주적 서정의 내재적 사회 관련성일 것이다. 어른들이 벌여놓은 잘못된 싸움판에 투고자는 순진하게 말려 들어간 셈인데, 하지만 그 자신이 의식하지 못..
이영희씨의 시는 시의 도반(道伴)들에게 썩 미묘한 문제를 제기한다. 시가 현실에 대한 비유라는 건 토론을 요하지 않는 일반적 정의 중의 하나인데, 이씨의 시는 그 정의와 대각선의 방향으로 어긋나 있는 것이다. 이씨의 시를 저 정의의 순수한 시각으로 독해하면 시의 풍경은 별로 사실스럽지도 않고 그에 붙는 ‘설명’들도 조급하기만 하다. 그러나 거꾸로 비추어 보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난다. 다시 말해, 시가 현실의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 시의 비유라고 읽는 것이다. 그렇게 읽으면 속이 개에 불과한 거죽의 인간들이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서성이는” 모습으로 목줄이 매인 채로 “어둡고 좁은 지하차도를 지나” 넘어졌다 일어서고 밀려갔다 밀려오길 반복하는 치욕과 불안의 실상을 포장하는 가운데, 러브..
박진성의 시는 일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돋보인다. “수유여중 학생들 겔포스처럼 언덕으로 흘러내리고 있어”는 교문 앞 언덕을 주르르 내려오는 하얀 교복 입은 학생들의 모습을 썩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온갖 타악기를 태우고 기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도 상투적인 감각을 훌쩍 뛰어넘는다. 한결같이 반복되는 기차 소리를 때마다 장소마다 다르게 들을 수 있게끔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의 섬세함은 진실함과도 통하고 있어서 삶의 애환이 예리하게 포착되고 있다. “느린 자전거 한 대만 쓰러져도 모두가 다칠 것 같은 밤의 시장길 모퉁이”같은 구절은 시장 골목에서의 힘들고 고단한 삶을 겪었거나 체감하지 않으면 씌어질 수가 없다. 약점이 있다면 그가 생을 미리 비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하는..
비평은 무엇으로 사는가? 시대적 문제의 징후를 포착하고 그 가능성을 가늠하는 것? 또는 텍스트의 윤곽을 본뜨고 그 섬모들을 고르는 것? 그것도 아니면, 텍스트의 표면과 내부의 운동 사이의 차이를 측정하는 것인가? 사실은 모두일 것이다.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는 시대의 문제는 허황하기 일쑤고, 시대와의 어긋남을 고민하지 않는 텍스트는 시체와 다름없을 것이며, 모든 읽을 만한 텍스트는 세계의 문제를 제 몸의 상처로 앓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조강석의 『경험주의자의 사계』, 소영현의 『분열하는 감각들』, 김영찬의 『비평의 우울』을 최종 검토의 저울 위에 올려 놓았다. 『경험주의자의 사계』는 텍스트의 구체성에 몰입하는 가운데 세계의 창을 열어나가겠다는 비평가의 의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분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