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2000년 제 1회 '현대시 작품상' 심사평 본문

심사평, 추천사 등

2000년 제 1회 '현대시 작품상' 심사평

비평쟁이 괴리 2022. 12. 10. 18:05

김명인 시인의 길의 침묵을 요약하는 시구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가계는 전설에 도달한다. 그리고 뒷자리는/늘 비어서 쓸쓸하다”(할머니)일 것이다. 시인의 눈길은 그 뒷자리에 가 닿아 있다. 그 뒷자리에는 문득 멈추어버린 생의 잔해들이,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진액이 다 빠져나간 술지게미의 일상이 적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적막한 폐허의 풍경을 시인의 명상은 꿈결인 듯 허정허정 헤매이는데, 그 꿈결의 리듬이 이 폐허에 전설의 품격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명상 속에서 태어나는 전설은 실제의 전설처럼 장엄하지 않고 애잔하며, 삶의 성화로 기능하지 않고 반추로 기능한다. 그것은 시인의 명상이 세상의 진행에 대해 같은 규모로 반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순 시인의 󰡔우파니샤드 서울은 그 특유의 시적 방법론이 잘 드러나 있는 시집이다. 그 방법론의 첫째 항목은 겹겹이 접혀져 있는 마음의 주름을 펴는 것이다. , 그의 시적 자아는 풍경 혹은 세계와 직접 대응하지 않고 정황이 배어든 자신의 부분들과 대응하여, 그 중첩의 면들을 한장한장 펼쳐 나간다. 이 첫번째 방법은 그런데 청승으로 나갈 수도 있고(한의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것), 요기로 피어날 수도 있다(“굽이굽이 펴리라의 황진이 류). 청승은 내면의 주름을 안에서 펼치는 데서 나오고 요기는 그것을 바로 바깥의 물상으로 치환시키는 데서 발생한다. 김혜순 방법론의 두번째 항목은 주름을 안에서 펼치되 바깥쪽 면들을 펼치는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청승이나 요기로 가지 않는 대신 요염한 사념, 즉 세계의 내적 사유라고 할 수 있는, 정서적이고 동시에 지적인 성찰의 공간을 만든다.

박서원 시인의 󰡔이 완벽한 세계는 도전적인 시집이다. 도전적이라는 것은 그가 전통적인 미학 개념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간다는 뜻에서 쓰인 것이다. 전통적인 시학이 세계의 언어적 가공을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면, 박서원의 시는 거꾸로 언어의 세계 속에 사물들을 마구 난입시킨다. 간편하게 언어 쪽을 의미에 사물 쪽을 무의미에 대입한다면, 박서원의 시는 세계의 의미의 단일성을 파괴하고 그 세계를 의미화를 향하는 사물들의 들끓는 투쟁으로 변용시킨다. 그것을 통해서 그는 탈언어의 세계, 즉 의미 초월 혹은 신비의 세계로 가지도 않는다. 그가 줄기차게 보여주는 것은 의미와 무의미의 끝나지 않는 싸움의 비망록이다.

이 세 시집을 두고 우열을 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어찌 이들 뿐이랴. 예심을 통해 올라온 시집들, 더 나아가, 예심위원들을 불면과 불안의 고통 속으로 몰아 넣었을 많은 다른 시집들이, 두루 나름의 방식으로 90년대의 한국 사회에 치열하게 응전하면서 한국시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미의 의식(意識)은 그러하지만, 사회의 의식(儀式), 그러나, 다를 수밖에 없어서, 오늘의 잔치가 한 집에서만 열려야만 한다는 원칙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아마 우리는 중용을 택하기로 한 것 같다. 󰡔우파니샤드 서울을 수상작으로 결정하자는 주장에 대해 나는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