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현대시 작품상 (4)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명인 시인의 『길의 침묵』을 요약하는 시구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가계는 전설에 도달한다. 그리고 뒷자리는/늘 비어서 쓸쓸하다”(「할머니」)일 것이다. 시인의 눈길은 그 “뒷자리”에 가 닿아 있다. 그 뒷자리에는 문득 멈추어버린 생의 잔해들이,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진액이 다 빠져나간 술지게미의 일상”이 적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적막한 폐허의 풍경을 시인의 명상은 꿈결인 듯 허정허정 헤매이는데, 그 꿈결의 리듬이 이 폐허에 전설의 품격을 부여하고 있다. 물론 명상 속에서 태어나는 전설은 실제의 전설처럼 장엄하지 않고 애잔하며, 삶의 성화로 기능하지 않고 반추로 기능한다. 그것은 시인의 명상이 세상의 진행에 대해 같은 규모로 반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순 시인의 우파니샤드 서울』은 그 ..
순박한 격정의 개가 한국 땅에 시인은 밤바다의 별들처럼 많지만 시에 온 생을 바치는 시인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배한봉 시인은 그런 드문 시인 중의 하나이다. 그는 오랫동안 외롭게 묵묵히, 그러나 열정적인 도취의 상태에서, 시를 써왔다. 때문에 그의 어느 시를 읽어 보든, 시에 대한 ‘순박한 격정’이 진솔히 배어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오늘 검토된 시들에서도 우리는, 현실에서는 후다닥 지나가버린 봄내음과도 같은 신생의 씩씩한 기운이 줄기차게 피어오르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새는 언제나 맨발이다」의 제목이 그대로 암시하듯, 저 맨발의 새로운 생이 ‘언제나’ 종횡하는 게 배한봉의 시인 것이다. 그런데 저 맨발의 힘은 어디에서 솟아나는 것일까? 그것은 세상의 어둠의 무게가 압도적인 만큼 불가해한 비밀..
‘현대시 작품상’은 말 그대로 ‘현대시’에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대modernity란 그 어원modus으로 보자면 ‘새로움’이다. 현대란 새로움이 존재의 원리인 시대이다. 이것은 현대의 주인인 인간이 현대의 이름으로 세계의 주인임을 자처하기 시작한 때부터 인간에게 불가피한 숙명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는 낡은 것과의 결별을 그것은 뜻할 테지만, 그러나 그 결별의 양식이, 논리와 윤리, 경제 그리고 감각의 차원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새로움의 형태는 무한히 다를 수 있으며, 그 기능 역시 그렇고, 그것의 수명 역시 마찬가지다. 그 논리의 연장선에 있는 어떤 좁은 구멍으로 들여다보면, 무조건 새로운 게 좋은 게 아니고, 우리가 새롭다고 생각하는 게 꼭 새로..
다달이 선정되는 현대시 작품상 추천작들은 때마다 발표된 작품들 중, 한국시의 상황 혹은 한계를 꿰뚫고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시적 형상을 얻은 시들이다. 그 점에서 추천작들은 ‘현대시 작품상’의 이름에 고루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나는 강정의 「봄날의 전장」이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를 은근히 기대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시가 최근 들어 일취월장할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그가 이루어낸 시적 성취에 비해 지나치게 저평가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언어의 모험이 실험적 차원에 놓이기보다는 실존적 기투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내 나름의 판단도 그 쪽을 후원하도록 내 마음을 이끌었다. 그러나 투표 결과를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김영남 시인 역시 저평가되어온 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