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심사평, 추천사 등 (77)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고재종의 「장엄」 서정의 극점을 비추는 시다. 극점이 보인다는 것은 서정의 표준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서정을 세계의 자아화라는 말로 요약한다면, 이 시는 그 자아화의 끝에서 문득 자아의 소멸을 겪는다. 그 충만과 소멸 사이의 긴장을 장엄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서정=세계의 자아화'라는 상투적인 규정이 매우 그릇된 것이라는 견해를 글로 만든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길 바란다: 「‘서정’을 규정하는 이 땅의 희극에 대해서: ‘한국적 문학 장르’ 규정 재고 一‘세계의 자아화’라는 허구 혹은 ‘보편적 자아’의 끈질김」,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을 좇아서』(2020). 이 견해에 근거하면, 「장엄」은 차라리 '서정의 근본'에 육박했다고 해야 하리라. * 김영승의 「瀕死의 聖者」 김영승은..
『앙리 4세』/하인리히 만 지음/김경연 옮김/미래 M&B 16세기 내내 프랑스 전역을 내란으로 내몰았던 종교전쟁을 종식시킨 앙리 4세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 정복자가 아니라 화해를 주도하고 평화를 정착시킨 인물의 역사적 무게도 주목할 만 하지만 , 그 험난하고 장구한 도정을, 정치적 이해관계와 종교적 열정 그리고 개인의 욕망을 교묘하게 배합하면서 끌고 가는 작가의 솜씨가 돋보인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게 험. 그러나 투박한 번역문의 안개를 조금씩 헤쳐나가며 읽다보면 하인리히 만의 다채로운 문체의 곡예를 감상할 수 있다. 『밤이 낮에게 하는 이야기, 아주 느린 사랑의 발걸음』/엑토르 비앙시오티 지음/김남주 옮김/프리미엄 북스 일찌기 자전소설을 일탈과 귀환이라는 두 명제로 정의한 사람이 있었다. 삶이..
* 총평 좋은 책이 많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 알 수 없는 이유도 있다. 가령,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주목에 값하는 작품들이 출품되지 않았다. 물론 알만한 이유도 있다. 여성주의의 오랜 지배(패미니즘까지 포함하여)가 서서히 생동감을 잃어가고 있는 데 비해, 그것을 잇거나 대체할 다른 주제가 주목을 받을 만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한국문학의 문화적 정황도 그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또다시 외국문학 쪽에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운영 회의 쪽에서는 한국 문학을 가능한 한 ‘우대’해주기를 희망하였으나 아무리 눈에 불을 켜도 맞불로 반기는 작품들을 좀처럼 찾기가 힘들었다. “낡은 잡지처럼 그저 통속하거늘”이라는 옛시인의 시구가 쓴 소태처럼..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지음/문학과지성사 김영하에게서 많은 사람들이 신세대적 감수성과 그 감수성을 글로 옮기는 재능을 칭찬하고 있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성실성을 사고 싶다. 그렇다는 것은, 재기발랄한 말솜씨와 화려한 이미지로 독자의 눈길을 빠르게 이동시키는 그의 소설들이 실은 치밀한 배경 조사와 적절한 정황 구성, 말의 정확한 쓰임을 위한 작가의 오랜 준비와 노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적지 않은 비평가들에게 당혹감과 실망을 야기한 「비상구」야말로 조사와 준비가 완벽하게 작품의 형상 속에 녹아서 그 흔적을 전혀 느끼지 못할 수작이며, 오히려, 돋보이는 주제의식 때문에 비평가들의 입에 회자된 「흡혈귀」가 쉽게 씌어진 작품임을 느낄 ..
■ 선정 소감 첫 회인 탓에 대상 도서가 근 100종에 달했다. 아직 회원으로 등록하지 않은 출판사가 많다는 것을 유념한다면, 순문학에서만 4개월 100종은 놀라운 생산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덕택에 선정자로서는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고, 정밀한 검토가 사실상 불가능했다(누가 우리에게 분신술을 가르쳐다오!) 또한 같은 이유로 ‘괜찮은’(우리가 보기에) 도서 수가 ‘괜찮아야 할’(출판인 회의가 제한한) 숫자보다 넘쳐나고야 말았다. 너무 잘 알려진 베스트 셀러는 일찌감치 제외되었고, 그래도 아쉬운 몇몇 도서들은 다음 회로 이월되었다. 분포를 보니, 소설 류가 약 2/3를 차지하고 나머지가 시집, 평전, 에세이, 문학이론 등이었다. 이에 근거해 소설 류에서 6종, 비소설에서 3종을 뽑기로 하였고, 소설 6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