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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가고 온다. 무엇이 가고 오느냐 하면, 김현이 가고 온다는 것이다. 김현은 1990년 6월 27일 새벽에 음침하게 매복해 있던 죽음과의 줄다리기에서 손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꼬박 3년 만인 엊그제 27일 김현 문학 전집 전 16권이 완간되었다. 전집 완간과 더불어 김현은 마침내 다시 왔다. 물론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오지는 않았다. 김현 전집은 1991년 6월부터 6개월 간격으로 모두 5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김현은 그가 죽은 날로부터 지속적으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파도는 3년 동안 죽음과 삶 사이의 방파제를 두드린 끝에 드디어 범람하였다. 그 해일, 그것은 지금․이곳의 세상을 소리없이 넘실댄다. 귀가 그것을 부인해도 몸은 그 은은한 파동의 떨림을 들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진동에 당황하..
김현 선생은 한글로 사유하고 한글로 글을 쓴 첫 세대의 비평가였다. 그 한글은 세종의 훈민정음도, 『독닙신문』의 ᄒᆞᆫ글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인의 생활에 뿌리내린 한글이었다. 그러나 근대적 민족국가로서의 한국이 불구였듯이 우리의 한글도 아직 대가 약했고, 외국어의 범람 속에서 위태로웠다. 김현 선생은 한글로 사유하고 한글로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한글로 사유하고 한글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적이지 못한 언어로 ‘민족’의 문학을 외쳤을 때, 그이는 민족문학의 실체를 글로 보여주었다. 선생이 하신 크고도 다채로웠던 모든 작업들은 이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다. 김현 선생은 문학평론가였고, 문학사가였으며, 문학 연구가였다. 평론가로서의 그이에게서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해..
만일 ‘아끼는 책’이 “귀중히 여기어 함부로 다루거나 쓰지 않”는 책을 뜻하는 것이라면, 내게 그런 책은 없다. 예전에 그런 책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누군가가 집어 갔거나 아니면 내가 팔아먹었을 것이다. 그건 책이 아니라 골동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끼는 책이 사전적인 그런 뜻으로가 아니라 애독하는 책이라는 뜻으로 쓰일 수도 있다면, 그런 책은 여러 권 있다고 할 수 있다. 김현 선생의 『한국문학의 위상』,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롤랑 바르트 전집, 라깡의 『강좌』 등등은 나에게 아까운 정신적 자양분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책들이다. 그 중에서도 김윤식․김현 공저인 『한국문학사』(민음사, 1973)는 문학 수업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되풀이해 읽으면서 무언가를 그로부터 훔치는 책이다. 『한국문학사..
『다시 읽는 한국 시인』(문학동네, 2002)은 문학대법관이라는 칭호가 어울릴 유종호 교수의 비평적 면모를 다시 한번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온당한 해석을 위한 세심한 고려와 좋은 작품을 가려내는 솜씨, 그리고 편향된 해석들에 대한 엄한 지적들로 이루어진 각편의 글들은 두루 모범적 판례로 기억해두어도 좋을 것들이다. 이러한 특징은 유종호 비평의 문장(紋章)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새삼스레 풀이할 것까지는 없을 것이다. 이 책에는 비평가의 입장적 특성 말고도 주목할 점이 세 가지 있다. 그 세 가지가 모두 제목인 『다시 읽는 한국 시인』의 ‘다시’에 함축되어 있다. 우선, 이 책은 임화, 오장환, 이용악, 백석이라는 4명의 월북 시인을 다루고 있다. 잘 알다시피, 네 시인은 30년대에서 6․25 전까지 ..
채광석 평론집(『민족문학의 흐름』, 한마당, 1988)이 출판되었다. 그의 사후(死後) 9개월만의 일이다. 그는 80년대 문학의 한 두꺼운 흐름을 온몸으로 밀고, 끌고, 이고 나간 첨단의 이론가였고 치열한 실천가였다. ‘온 몸으로’, ‘첨단의…’, ‘치열한’의 강조사들은 고인에 대한 의례적인 찬사가 아니다. 그는 그 말들에 합당한 문학인로서의 삶을 보여주었다. ‘삶의 전 부면에 있어서의 민중주체에 의한 민족해방’과 ‘그 운동을 위한 문학의 복무’로 요약할 수 있는 문학관의 포스터 역할을 했던 그의 비평은, 그 밑바닥에 역설적이게도 민중의 힘에 대한 낙관적 확신이 아니라, 민중의 거듭된 ‘거덜남’과 ‘으깨어짐’을 현실인식으로 깔고 있었다. 유신과 5월을 겪은 세대에게 그 좌절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