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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문학에 대한 열정과 문학에 대한 무지가 여름 숲의 흥분처럼 기승했던 ‘문청’ 시절 박이문 선생님의 『시와 과학』은 내게 교과서와 다름없었다. 당시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겪게 마련인 이념과 예술, 생활과 진리, 그리고 이런 말을 감히 해도 좋다면 혁명과 사랑 사이의 격정적인 혼돈 속에, 『시와 과학』이 제공한 ‘의식 차원’과 ‘존재 차원’의 명쾌한 구별은, 한 줄기 인식의 뱀처럼 스며 들어와, 양자택일의 문제를 상호 반사의 문제로 바꾸어 두 차원을 한꺼번에 껴안을 수 있는 개념(conception)의 지평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철학자들의 역사에서 그이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학비평가들의 계보에서 박이문 선생님은 정명환․송욱․정병욱․김붕구 선생님과 더불어 ‘명징화’의 세대에 속한다. 일본이..
아마도 한국의 인문교육이 정상적이었다면 이 책(이왕주․김영민, 『소설 속의 철학』, 문학과지성사)은 태어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에 들어가면 깡그리 잊어버릴 과도한 정보로 청소년들의 두뇌를 터지게 하는 중등 교육과정이거나 논술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사유의 획일성을 아예 제도화한 입시 정책을 두고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도저히 없다. 도대체 논술이 별도 과목으로 독립해야 할 까닭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논술의 목적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사유와 논리적인 언어능력을 계발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꾀를 써도 윤리 문제의 틀을 벗어날 수 없고 학생들은 미리 짜인 각본을 들고와 단어들만 요리조리 바꿔가며 답을 조립해내는 지금의 논술은 오히려 본래의 취지를 컴컴한 독방에 유폐시키는 억압 기제가 아니라..
우선, 내가 ‘죽비소리’의 근본 취지에 호감을 갖지 않았다면 이 반론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밝혀야겠다. 그만큼 채호기 시집 『밤의 공중전화』에 대한 죽비소리의 서평(97년 9월호)은 서평이라기보다는 상스런 욕설을 방불케 해서 여간 실망이 큰 것이 아니었다. 비평이 아닌 비난은 본래 논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나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닌 비난에 대해 반론을 쓰기로 결정한 것은 죽비소리의 바른 방향을 서평위원들이 재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비평이 상업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는 암울한 분위기에서 비평의 풀무가 되기를 자처한 이 ‘죽비소리’가 비평의 ‘비판성’을 의도적으로 과장한 만큼 더욱 더 논리의 기본틀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틀은 비판이 방뇨의 ..
"들어가보면 언어도 세상도 없고, 거북함, 불편함, 편안함, 즐거움의 감각적 깊이만이 있다." (3:88) 1 이 글을 쓰기 위해, 「김현 문학 전집의 편집 체제」(김현 문학 전집 제16권, 『자료집』, 문학과지성사, 1993)를 다시 읽다가, 나는 그 글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선생님의 이름을 남발했음을 발견하고 잠시 놀란다. 가령, “그가 생전에 책으로 묶지 않았던 글들의 수집은 그가 남겨놓은 스크랩북 네 권을 토대로 삼았다.”고 써도 될 문장을 나는 “김현이 생전에 책으로 묶지 않았던 글들의 수집은 김현이 남겨놓은 스크랩북 네 권을 토대로 삼았다.”(3:43)고 씀으로써 꼬박꼬박 그이의 이름을 명시하고 있었다. 이런 예를 포함하여, 도처에서 ‘김현’은 마치 ‘봉무제’(윤흥길)씨의 ‘무제’처럼 박혀..
그 책(김현, 『한국문학의 위상』, 문학과지성사, 1977)을 나는 두 권 가지고 있다. 한 권은 서점에서 사서 읽고 감동했고 다른 한 권은 저자가 주어서 감격했다. 그 책이 감동의 샘이 되었을 때 나는 저자에게 홀린 문학도였다. 어떤 감동도 무조건 오지는 않는다. 감동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그 의지는 감동의 기미라고 말할 수 있는 기이한 감정의 안개 속에서 태어난다. 감동의 기미, 그러니까, 조산된 감동의 분비물들은 그 책 이전의 저자의 책들, 『상상력과 인간』, 『사회와 윤리』, 그리고 김윤식 선생과 공저한 『한국문학사』 등을 읽으면서 스며 나왔을 것이다. 그 책들은 문학과 삶의 관계에 대한 나의 경직된 고민을 교정해준 책들이었다. 저 유명한 ‘순수’와 ‘참여’의 싸움이 그것이었는데, 경직된 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