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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악의 상징』(양명수 역, 문학과지성사, 1994)은 악마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을 위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인간의 악 체험에 대한 인간에 의한 교정을 둘러싼 인간의 사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악은 악에 대한 사유이다. 그 사정이 “악이 아무리 뿌리깊다 해도 선만큼 근원적이지는 않다”는 말에 간명하게 요약되어 있다. ‘악의 상징’은 때문에 『의지의 철학』에 속한다. 악은 선에 속한다. 리쾨르의 악학은 악의 치유학이다. 그의 존재론은 윤리학과 한덩어리로 움직인다. 악은 미토스로부터 로고스로 향한다. 그 처음에 잘못이 있다면 그 끝에 자유가 있으며, 그 처음과 끝을 잇는 도관을 말이 흐른다. 로고스란 곧 말씀이니, 처음과 끝에 이르는 전 길이에 로고스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리쾨르의 윤리학은..
지상에 유배된 아폴론은 악기를 놓고 목동의 막대기를 듭니다. 순수하고 맑은 외관은 노래를 부를 때와 다름없이 퍽 어울립니다. 하지만 가수의 욕망과 목동의 의무는 어긋나기만 합니다. 장식의 희열을 노동하는 의지로 변화시켜나가는 동안 아폴론의 타고난 아름다움은 이제 법칙화된 미의 형식으로 뒤바뀝니다. 순수한 기쁨으로 글을 한 줄 한 줄 써나가던 시절이 여러분에게 있었지요. 지금 여러분의 시간은 전진과 수련의 시간입니다. 세상의 정면을 마주보고 미래를 앞당기기 위해 뛰어가는 때입니다. 글쓰기의 기쁨은 인식의 노동으로 바뀌었습니다. 단어 하나를 아름답게 세공하는 시간은 지나고 사회의 구조와 억눌린 자의 고통과 사랑의 난해함을 배우게 됩니다. 인식하는 정신은 세상 전체를 자신의 몸으로 채울 꿈을 꿉니다. 노래의 ..
대학생 문학은 잠재 문학이고 동시에 문학의 잠재태입니다. 문학의 수면 위로 부상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 운동을 한다는 점에서 잠재 문학이며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예측불가능의 양태로 품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의 잠재태입니다. 또한 대학생 문학은 아직 문학의 유통 회로 속에 끼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에도 잠재적입니다. 무릇 부재하는 것은 현존하는 모든 것의 미래형입니다. 이 잠재 문학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학번을 거쳐가며 항구적으로 되풀이되는 아마추어리즘에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개의 경향이 길항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 하나는 생의 리듬과 언어의 리듬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직 잠재 문학은 저의 언어를 취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언어는 시방 여러분의 생의 거죽들, 생의 모공들, ..
오늘의 소설에 대한 세 가지 답변 [1] 1. 대중문화의 기법․형식 수용문제 질문:최근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장편소설들은 추리소설의 기법이나, SF소설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대중소설의 기법이나 대중문화의 형식들이 본격소설에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현상일텐데요. 이러한 소설 형식의 변모가 지닌 새로운 의미와 한계에 대해서 비평가의 입장에서 짚어주시기 바랍니다. 50년대의 실험극단들이 좋은 참조가 될 것이다. 센느강 좌안에 옹기종기 모여서 ‘코메디 프랑세즈’의 정통 고전 연극과는 다른 연극을 만들고 부수기를 되풀이한 새 연극인들은 보드빌, 인형극, 신문 가십, 저자거리의 저속어들에서 재료를 취하여 그들만의 특이한 연극 언어와 기법을 제작해내었고, 마침내 그들의 연..
1 가능성은 기대를 동반한다. 그것은 앞날에 대한 예측이 아니다. 그것을 말할 때 사람들은 이미 희망을 말하고 있다. 가능성을 말할 수 있을 때는 그러니 행복한 때이다. 그의 사전에 가능성이란 단어가 없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그의 삶은 이미 죽음이다. 미래로 열려 있지 않은 삶은 운동하지 않는 삶이고, 운동하지 않는 삶은 정지된 삶이며 정지된 삶은 죽은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에 관해 말할 지금, 더욱이 한국 문학에 대해 말할 지금은 가능성을 발설하기 전에 오래 주저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곳에서 한국문학의 가능성이 있는가? 어느 지금, 어느 이곳인가? 이 물음은 당연한 대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시․공간적 축의 변화, 즉 삶의 좌표의 이동이 물음의 밑바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명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