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가슴이 답답할 때-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 본문

문신공방/문신공방 하나

가슴이 답답할 때-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

비평쟁이 괴리 2023. 4. 27. 01:45

만일 ‘아끼는 책’이 “귀중히 여기어 함부로 다루거나 쓰지 않”는 책을 뜻하는 것이라면, 내게 그런 책은 없다. 예전에 그런 책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누군가가 집어 갔거나 아니면 내가 팔아먹었을 것이다. 그건 책이 아니라 골동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끼는 책이 사전적인 그런 뜻으로가 아니라 애독하는 책이라는 뜻으로 쓰일 수도 있다면, 그런 책은 여러 권 있다고 할 수 있다. 김현 선생의 『한국문학의 위상』,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롤랑 바르트 전집, 라깡의 『강좌』 등등은 나에게 아까운 정신적 자양분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책들이다. 그 중에서도 김윤식․김현 공저인 『한국문학사』(민음사, 1973)는 문학 수업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되풀이해 읽으면서 무언가를 그로부터 훔치는 책이다.
『한국문학사』는 한국인의 주체성을 세우려는 문화적 노력이 기운차게 일어난 70년대에 그 학문적 성과의 하나로서 나온 책이다. 저자들은 당시 한국문학의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이었던 전통단절의식과 이식문학론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동시대 역사학의 성과에 기대어 한국 근대 문학의 뿌리를 영․정조에까지 소급시킴으로써 한국 근․현대 문학을 한국인들 자신의 역사적 실존에 접목시켰다. 물론, 조선조 후반기에 근대성의 뿌리를 두는 이른바 ‘맹아론’은 오늘날 젊은 사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비판받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문학사』의 문제틀도 이제는 수정될 시점에 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황과 개인의 도전과 응전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된 문학사로서는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작가 중심의 문학사 기술도 내 생각에는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패배의식과 허무의식에 젖어 있던 당시의 한국문학의 풍토에 『한국문학사』가 던진 신선한 충격과 그것이 심어준 우리 문학에 대한 자긍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한국문학사』를 자주 뒤적이는 까닭은 꼭 그것의 학문적 의의 때문만이 아니라, 그 문체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문학은 개별문학이다’라는 저자들의 강렬한 문제의식이 그대로 투영된 『한국문학사』의 문체는 힘차고도 유려해서 문학사의 흐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바, 문체는 내용의 침전물이라는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명제에 대한 뛰어난 실증을 제공한다. 내가 글이 막힐 때마다 『한국문학사』를 더듬어 찾는 것은, 주제와 형식, 기표와 기의, 더 나아가 삶과 문학 사이의 맥혈이 시원하게 뚫려 있는 그 책으로부터 매번 신선한 기운을 흡입하고 싶어하기 때문인 것이다. 
󰏔 1997. 1, 민족문학작가회의, 내가 아끼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