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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분명 오늘의 문학은 중심에 서 있지 않다. 그것이 삶이거나 문화거나 문학은 그의 터전에서 실긋 비켜 서 있다. “문학[은] 그것을 산출케 한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준다”는 문구는 문학의 황금기를 연 70년대 어느 시인 총서의 표제문이다. 오늘의 문학은 그런 휘장을 두르기를 주저한다. 언제부터인가, 다른 말들이 그것을 밀쳐내기 시작했다. 이념의 몰락, 과녁의 실종, 영상 매체의 도전, 문화 산업 속의 상품화… 그리고 마침내는 문학의 죽음이라는 유령까지도 출몰하였다. 문학을 죽일 수 있는 말들이란 말들은 다 상자 밖으로 튀어나와 낄낄거리게 되었다. 사회의 정신적 모습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는 것, 바로 그것이 문학 정신이라면 이제 문학의 어느 곳에 정신이 깃들 처소가 있는가? 황폐한 정신,..
노벨문학상은 1895년 파리에서 작성된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0년 설립된 ‘노벨 재단’이 스웨덴 한림원에 심사를 의뢰하여 1901년 첫 회 수상자를 내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노벨 서거일인 12월 10일 스웨덴 국왕이 시상한다는 관례도 더해져서 외형상의 권위를 잔뜩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사설단체가 주관하는 셀 수 없이 흔한 문학상들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이 곧바로 엄청난 관심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세계 문인 전체에 기회가 부여된 막대한 상금 덕택이었다. 심사를 의뢰받은 스웨덴 한림원은 처음부터 “한림원을 일종의 ‘국제 문학 법정’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으며 심사위원회는 모든 심사과정을 비밀에 부친다는 원칙을 고수했는데, 그것이 상이 발표될 때마다 끊임없..
※ 노벨상 소식이 들려오는 계절이 왔다. 『문신공방 ․ 하나』(2006)를 이 블로그에 올리는 일을 시간 날 때마다 해오고 있는데, 하필이면 시의적인 글을 등록한다. 이 글은 1998년에 씌어진 것이다. 다시 읽어 보니, 여전히 유효하다. 며칠 전에 고백한 침통한 마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10월이면 어김없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 중의 하나가 노벨상이다. 이 얘기는 타령조를 동반하곤 하는데 그렇기도 할 것이 한국은 한 번도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노벨상 타령에는 묘하게 정형화된 틀이 있어 보인다. 우선, 여기에는 단순히 한국인의 긍지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 이상으로 인접국가들에 대한 경쟁의식이 숨어 있다. 요컨대 중국도 받았고 일본도 받았는데 한국은 왜 못 받는가, 라는 투정이 배..
※ 1996년에 씌어졌고, 2006년 『문신공방 1』에 수록되었던 이 글을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기가 막히고 침통한 일이다. 한국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물음을 던지는 것조차 겸연쩍을 정도로 한국문학은 이상궤도를 비행하고 있다. 분명 외형적으로 한국문학은 괄목상대하게 팽창하였다. 경제 침체가 다급한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킨 올해에도 소설 공장들은 바쁘게 돌아간다. 문학 출판물 광고가 일간지에까지, 심지어 TV에까지 침범하는 특이한 한국적 현상도 예년과 다를 바 없이 왕성하다. 그러나, 서점에 나가 보라. 문학 코너에 주단처럼 드리워져 있는 온갖 화려한 서적들은 스릴러, 무협소설, 낙서시, 괴기물, 싸구려 교양물들, 요컨대 문학의 본래적 기능이라고 간주되는 반성적 힘 대신에 한..
어느 시인이 “그 마을의 주소는 햇빛 속이다”라고 썼던 것을 떠올리며, 나는 ‘신춘문예의 주소는 문화제도 속이다’라고 쓴다. 그것은 문화제도 속에서 살아 숨쉰다. 그것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그러하다. 긍정적이라는 것은 문화제도의 중심으로의 구심적 운동을 그것이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쓰인 것이다. 외재적으로 신춘문예는, 문단이라는 공식 기구에 편입되려는 욕망을 겹으로 두르고 움직인다. 내재적으로 그것은, 문화제도가 문화의 본질을 미리 전제하고 그것에 맞추어지기를 요구하듯이, 문학적 본질을 상정한다. 작품 자체이건, 심사평이건, 당선 소감이건, 신춘문예를 둘러싼 언술행위들은 문학적 본질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주장하는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심사평은 작품에 씌어진 언어들의 의미를 묻기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