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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책사에게 조언함-『현대문학』의 ‘죽비소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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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책사에게 조언함-『현대문학』의 ‘죽비소리’

비평쟁이 괴리 2023. 7. 13. 08:46

우선, 내가 죽비소리의 근본 취지에 호감을 갖지 않았다면 이 반론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밝혀야겠다. 그만큼 채호기 시집 밤의 공중전화에 대한 죽비소리의 서평(979월호)은 서평이라기보다는 상스런 욕설을 방불케 해서 여간 실망이 큰 것이 아니었다. 비평이 아닌 비난은 본래 논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나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닌 비난에 대해 반론을 쓰기로 결정한 것은 죽비소리의 바른 방향을 서평위원들이 재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비평이 상업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있는 암울한 분위기에서 비평의 풀무가 되기를 자처한 이 죽비소리가 비평의 비판성을 의도적으로 과장한 만큼 더욱 더 논리의 기본틀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틀은 비판이 방뇨의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는 최소한의 요건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면, 그런 비난은 비평을 되살리기는커녕, 꺼져가는 비평의 불씨에 재를 뿌리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실망도 실망이려니와 한국 비평의 장래를 정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평자는(공동의 이름으로 나갔으니까, 모두에게 해당하는 지적이 되겠다) 자멸하고 싶은 것인가? 한국비평의 빈사상태에 아예 곡기를 끊고 동참하고 싶은 것인가?

내가 실망한 까닭을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제시하기로 하겠다. 우선, 이 서평은 분석은 없고 주장만 있다. 가령, “[한편의 시를 인용한 후] 얼핏 보면 성행위 과정에서 살갗에 발생하는 감각들을 섬세하게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결코 감각적 구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얼핏 보면 섬세한 듯한데, 자세히 보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렇다면, 얼핏 보면 왜 섬세한지, 아니, 그건 차치하고라도, 자세히 보면 어째서 감각적 구체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지 밝혀야 했으리라. 그러나, 그 다음의 진술들은 같은 주장의 동어반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이야말로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지 않은가?

다음, 논리의 관념성과 편협성은 서평자의 지적정신적 수준을 의심케 한다. 이런 대목을 보자시인은 몸, 특히 성적인 차원에서의 몸에 대해서, 몸의 감각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최근 우리 문화의 한 유행이기도 하다. 몸에 대한 관심의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몸에 대한 관심이 성에 대한 욕망과 호기심을 무한 증폭시키는 상업적 전략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최근에 발생한 몇 건의 외설시비는 외설로 규정되어야 마땅하다고 판단된다.” 다섯 문장이 모두 겨냥하는 바가 달라서, 썩 포스트모던한 혼돈을 연출하고 있는 대목이다. 은 시인에 대한 관찰이다. 이어서 서평자는 시인의 몸에 대한 관심을 우리 문화의 유행적 경향으로 확대시킨 후(), 그것에 대한 시비는 유보하기로 한다(). 그리고는, 앞 문장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진술을 돌연 제출한다(). 몸에 대한 관심은 상업적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인가? 밤의 공중 전화의 시편들이 상업적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몸에 대한 관심 자체가 그렇다는 것인가? 문단 끝의 어쨌든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에서 몸에 대한 관심도 일단 상업적 유행에 휩쓸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든다는 진술로 미루어 후자 쪽으로 해석해야 타당할 듯한데,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자신이 직전에 말한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그리고 서평 말미의 성의 노골성은 그 자체로 문제될 게 없다는 태도표명적 진술들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몸에 대한 관심이 그 자체로 상업적 전략이라면, 이미 그는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이고, 성의 노골성에 대해 이미 분노의 단죄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됨으로써 서평자는 독자를 모호한 해석 보류의 상태로 몰고 간다. 그것은 이중의 효과를 유발한다. 하나는 이라는 말을 꺼내기만 해도 불결함의 혐의를 가지고 있다는 쪽으로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과연 서평자는 에 와서, 몸에 대한 관심은 상업적 전략이니, “그러므로최근의 외설 시비는 무조건 단죄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서평자는 몸에 대한 관심이나, 더 나아가 노골적 성묘사가 그 자체로서는 문제가 아니라고 겉으로 주장하지만, 속으로는 모두 싸잡아서 외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의 과격한 수위를 고려한다면, 그는 건수를 올리기 위해 우범 지역의 아이들을 잡아다 족치는 형사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또 하나의 효과는 이렇게 대상을 불분명하게 흐림으로써 문화의 유행에 대한 혐의를 재빠르게 한 개인에게로, 밤의 공중전화의 시인에게로 옮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분석과 논증은 포기한 채 글의 분위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총구를 문화 일반을 향해 쑥 내밀었다가 잽싸게 시인에게로 돌려 빵 당기는 것이다(그는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되고도 싶고, 서부의 건맨이 되고 싶기도 한 말단 형사인 모양이다). 이런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야말로 상업적이지 않을까?

독자가 문단 말미의 “‘일단상업적 유행에 휩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는 약간의 유보적인 표현을 과도하게 존중하여, 의 문장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몸에 대한 관심이 [……] 상업적 전략에 광범위하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로 고쳐 읽기로 하자. 그렇게 되면, 의심과 진실 사이, 이용당하는 것과 저항하는 것들 사이에 이해의 공백이 생긴다. ‘일단의심이 들면, 그것이 정말 그러한지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서평자는 그 일단의 의심을 전부에 대한 의심으로 착각한 듯, 주장의 췌사들과 이중적 태도의 엉성한 곡예로 글을 지루하게 이어가고 있을 뿐, 분석은커녕 내가 생각하는 좋은 문학은 이런 것이다류의 최소한의 입장 표명도 하고 있질 않다.

비평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논쟁을 할 수가 없다. 따짐은 없고 목소리만 큰 강변이 어떻게 표류하는 비평의 배를 제곳에 정박시킬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죽비 소리는 요란하기만 한데, 정작 경책사(警策師)들은 졸고 있는 게 아닌지? 그렇게 졸면서 마구 휘두른 죽비가 선방을 마구 흠집 내고 있는 건 아닌지?

마지막으로 한마디. 서평 위원 6인의 공동 명의로 발표된다는 것은, 그 공동체가 소속원의 잘못을 은폐해주는 방패로서 기능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공동의 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기능해야 한다. 그 점에서 죽비소리는 공동체가 갖추어야 할 원칙과 규범을 서평 위원들이 함께 세우고 밝히며, 그것을 지키고 보완해 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저열한 수준의 비난이 이렇게 방치된다면, 서평 위원들이 자신들의 공동의 문학적 태도에 대한 토론들을 하고 있기나 한지 의심스러우며, 또 그로 인해 애써 마련한 선방(순수반성공간)을 스스로 망치고 있는 게 아닌가 저윽이 걱정스럽다. 부디, 이 고언이 약이 되길 바란다.

󰏔 1997. 11, 현대문학, 누가 죽비를 잡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