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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집-사람 김현의 존재론

비평쟁이 괴리 2023. 6. 22. 09:20

"들어가보면 언어도 세상도 없고, 거북함, 불편함, 편안함, 즐거움의 감각적 깊이만이 있다."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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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기 위해, 김현 문학 전집의 편집 체제(김현 문학 전집 제16, 자료집, 문학과지성사, 1993)를 다시 읽다가, 나는 그 글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선생님의 이름을 남발했음을 발견하고 잠시 놀란다. 가령, “그가 생전에 책으로 묶지 않았던 글들의 수집은 그가 남겨놓은 스크랩북 네 권을 토대로 삼았다.”고 써도 될 문장을 나는 김현이 생전에 책으로 묶지 않았던 글들의 수집은 김현이 남겨놓은 스크랩북 네 권을 토대로 삼았다.”(343)고 씀으로써 꼬박꼬박 그이의 이름을 명시하고 있었다. 이런 예를 포함하여, 도처에서 김현은 마치 봉무제(윤흥길)씨의 무제처럼 박혀 있었다.

아마도, 내 마음은 어떤 음모를 꾀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김현이라는 이름을 사방에 박으면서 무엇인가를 봉인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음의 범람을 가두는 봉인, 세상의 눈들로부터 그것을 보호하려는 다른 마음의 범람(범람만이 범람을 막는다!), 그런데 어떤 마음의 큰물을 나는 두려워했던 것일까?’라는 질문에까지 오면 나는 다시 막막해진다. 이번에는 아예 마음의 총체적인, 완강한 저항을 느낀다. 그런 질문이 고개를 내미는 것 자체가 몹쓸 짓이라는 듯, 아주 힘센 거리낌의 감정이 목덜미를 죄고 생각의 발생기였던 두뇌를 음울한 마음의 감옥으로 만든다.

딱딱한 벽으로 변해버린 두뇌의 피질을 뚫고 나의 추론적 의식이 기억해내는 것은 나의 무의식적인 그 행위는 선생님을 객관화하려는 과장된 주관적 충동이었으리라는 것이다. 그이를 본래의 이름으로 발음하는 것, 그것을 통해 나는 스승을 단지 하나의 언어, 단지 하나의 세상으로 떼어놓으려고 조바심하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 조바심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아주 복잡한 감정이 거기에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야심도 있을 것이고, 소심증도 섞였을 것이며, 두려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제는 혼자서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이 글이 끼리사랑으로 오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독립을 하긴 했으나 영원히 그이에게 못미치고 말리라는 예감도 있었을 것이다. 이 이질적이고 상반된 감정들은 전혀 화해하지 못하는 채로 법석이면서 징그러운 편집증을 만들어내는 데 협력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석하든, 이 모든 것들은 몸의 사건을 환기시킨다. 스승의 죽음과 더불어 어떤 탈구가 발생했다는 것, 그리고 그 탈구와 함께 문학적 질서가 개편되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물론 그 문학적 질서를 세상의 질서(문단적 질서라든가, 문학 경향의 질서, 문학과 정치 사이의 협상 테이블 등등)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 몸 안에 있던 것이며 따라서 팔할은 주관적인 범주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것을 납득하거나 설명하기가 힘들다. 몸은 이해하기 전에 겪는 것이고, 그 겪음은 언제나 필설로 다할 수 없게 마련이다. 아니, 필설로 규정하려들면 몸이 앞서서 언어를 흩어버린다. 허니, 나는 이 거듭되는 붓방아를 멈출 수 없다.

 

2

헌데, 왜 이 글을 쓰려고 나는 의도했는가? 이 주관적 육체의 질료들이 글쓰기의 주형판에 놓일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주관성이 개인적 지평을 넘어설 때일 것이다. 내가 겪은 몸의 사건이 그 비슷한 타인들의 사건들과 만나 일반성의 영역을 구성할 때일 것이다. 그때 몸에 대해서, 다시 말해, 인간 김현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보다 훨씬 앞서서 인간 김현에 대한 추억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말할 수 있다로 바꾸어주기에 충분하다. 정현종 시인처럼 가끔은 서로 황금 불알도 만졌느니(3213)라고까지는 못 말할지라도, 그이와 작은 인연이라도 맺은 사람들은 문학 평론가 김현과 사람 김현을 하나로 말한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비평문들조차도 그렇다. 가령, 선생님이 살아계셨을 때 발표된 김인환의 글쓰기의 지형학김현은 어디선가 멋진 오역을 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5373)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에게도 비평가 김현을 적기에 앞서 우선 술선배이자 말동무인 김현이 먼저 떠오른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나보다 앞서서 인간 김현에 대해 말한 사람들에 슬그머니 기대는 게 좋을 듯하다. 내 몸의 문제를 나는 스스로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솔직히 말해, 나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어떤 따뜻함, 편안함, 그리고 어두컴컴함 같은 느낌뿐이다. 그것을 이성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하니, 모든 게 뿌옇게만 여겨진다). 그들 쪽으로 우회하여 돌아가면 혹시 꽉 막혀 퉁퉁 부어 있기만 한 내 추억의 젖통을 윤활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 김현을 추억하는 것들 중 가장 즉각적인 것은 추모시들이다. 빠르기로야 일간신문에 실린 추모사들이 더 빠르겠지만, 그것들은 급히 혹은 엉겁결에 씌어져서 대개는 상투적인 이야기로 일관하고 있다. 그에 비해, 시인이 아닌 사람까지 다투어 내놓은 추모시들은 어떤 다른 장르의 글보다도 더욱 비평가로서의 김현이 아니라 친구 혹은 친지에 대한 상실의 충격을 거의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그렇다. 시들은 김현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그가 죽었는데도 여전히 한 동아리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추모시에 먼저 주목한 것은 소득이 있는 듯 싶다. 한 가닥 실마리가 잡혔기 때문이다. 이 추모시들이 집중적으로 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해일은 왜 그는 이제 반포에 살지 않는다./그는 이제 반포 아파트 88304호에 살지 않는다(3199)로 그의 추모시를 시작했을까? 강창민과 황지우는 그가 자주 다니던 술집 반포치킨을 떠올리고(200, 205), 황동규는 그가 죽은 날 밤 술 퍼마시고 쓰러져 자다가 아들의 방에서 화장실에서처럼/소변보고방을 나가/화장실에 누웠다,/태연히(201). 김광규는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204)에 비유한다. 김태동의 추모시 제목은 , 죽은 집의 기록(207)이다. 김정웅의 추억은 작은 추억의 오두막 한 채이고, 홍영철은 세 편의 김현 생각을 모두 신문사얘기로 채우고 있다. 정현종은 김현에 대해 5편의 시를 발표하는데, 그 다섯 편의 시가 모두 집의 이미지에 감싸져 있다. “우리는 실로 내장을 다해 웃었느니,/집도 절도 없는 그 웃음들은/인제 무슨 집 무슨 절로 서 있는지(황금 醉氣 1)이 술집 저 술집 유정 삼만리(정이 많아서), 그리고 幽宅이 있는 산꼭대기(亡者의 시간)처럼 혹은 그것을 환기시키는 단어가 직접 나오는 시들은 물론이려니와, 그렇지 않은 시들도 간접적이긴 하지만 아주 강하게 을 환기시키고 있다. 가령 겨울산에서 시간을 靑山에 묻었으니/마음은 문득 푸른 하늘이었는데,/우리의 몸은 또 무겁고/病床의 시간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청산(영원)/병상(시간)의 대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주/흐름의 대립이기도 하며, 황금 醉氣 2기분 좋은 글에 취한 목소리/종소리 울려 보냈다는 영혼의 거주처로서의 예배소에서 발화된 것이 분명한 구절이다(정현종 시인이 그렇다고 이 시를 교회나 절에서 썼다는 것은 아니다). 또 김지하의 은 어떠한가? “밖에 서리 내리나/실 끊는 이 끝 시리다의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그 시의 발화공간은 겨울밤 촛불 켜놓고 바느질을 하는 아랫목이다(지나가는 얘기로 덧붙이자면, 바느질을 하는 것은 사내다. 시로 미루어 그는 눈밝은 아내를 잃었다. 그래서 사내는 스스로 바느질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눈이 침침하다. 눈이 침침한 것을 두고 시인은 짐짓 나이 탓인가하고 딴청을 부리는 체 하지만, 실은 눈밝은 아내가 없어서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한다. 그 아내가 없어서 그는 눈 침침하고, “눈은 넋그물이라서 당연히 넋 컴컴하다”. 김지하의 무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지인들이 한결같이 과 연관된 추억을 토로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은 그에게서 집을 찾았던 것일까? 따끈따끈한 아랫목이 있고 도란도란 이야기가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사랑방의 집? 가령, 제자들에게는 끝도 없는 고통의 덩어리인 삶에 관한 이야기들을 [] 쏟아 넣어도 늘 관대하게 들어주셨고, 간혹 몇 가지 가능성을 암시해 주셨(6433)던 자리, 혹은, 친구들에게는 동지적 연대감을 개인적 우정이라는 끈끈한 풀로 묶어놓았(41429)던 장소?

바로 그 자신이 그 집이 아니었을까? 한 시인은 선생이 그에게 깨우침을 주었던 기억을 끄집어내면서 당신은 언제나 그랬다바깥을 열어가면서 안을 넓혀 놓으신다(8448)라고 적었다. 그러니까 시인은 선생과 만나기보다는 선생의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육체가 곧 넉넉한 한 채의 집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당신 스스로 그것을 의지하셨으리라. 구하라, 구해질 것이다, 라고 하지 않는가? 의지하지 않으면 결코 생기는 것은 없다.

김현 선생님의 무의식 속에 집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은 그 역시 선생님의 제자이고 정신분석비평을 전공한 불문학자 김연권이 내게 언젠가 귀띔해 준 것이다. 그때 나는 그에게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추모시들을 읽으며 나는 그의 직관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글들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가령, ‘데자뷔현상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광장의 한 대목을 거론하면서 그는 어떤 것 앞에서, 내가 언젠가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이곳에서는 살 만하다고 느끼는 것이 예술적 욕망의 본디 모습이다(2322)라고 적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문체이다. 어떤 사물이든지(‘어떤 것’) 그것은 곧바로 거주 공간(‘이 곳’)으로 바뀐다. 이어서 그는 말한다. “스스로 마개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바로 예술 속에서의 편안함이다. 예술 작품 속에서 계속 살고 싶다, 스스로 구멍이 되어 구멍을 막고 싶다, 그 무의식적 의지가 예술을 바라게, 욕망하게 만드는 것이다(323). 예술은 감상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예술은 존재의 터이다.

 

3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지인들이 김현에게서 집을 찾았다면, 그것은 김현 스스로가 집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타인들에게 김현이 집이었다면, 김현에게는 그가 만나는 타인들(의 작품)이 또한 집이었다.

그러나 그 집은 그냥 집이 아니다. 즉 그것은 단순한 안주와 휴식의 공간이 아니다. 앞에 인용된 문장은 그렇다면 예술 작품 속의 편안함은 모든 다른 편안함을 스스로 막는 편안함이다로 이어진다. “예술 작품 속에서의 편안함이란, 현실 부정 속에서의 편안함이다(323). 김수영의 폭포처럼 나타와 안정을 거부하는 무엇이 그의 집에 있었다.

나는 선생님에 대한 서투른 평문을 통해서 김현 비평의 근본을 활동이라고 정의했었다(7470). 그리고 나는 또 그가 세계 변혁의 원천은 떠돌이에게서 나온다는 독특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1137138 참조)는 것도 기억한다. 활동이 중심이라는 것은 그가 근본적으로 안주를 거부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글은 정착민적이라기보다 유목민적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집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니, 그가 집을 꿈꾸었으며 지인들이 그에게서 집을 더듬어 찾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마도 그가 꿈꾼, 혹은 무의식적으로 조성한 집의 공간은 아더 왕 이야기의 궁정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아더의 전설에서 궁정은 한 곳에 붙박혀 있지 않다. 사람들이 모여 무훈담을 자랑하거나 마상시합을 벌이거나 하는 장소가 정해지면 그곳이 궁정이다. ‘원탁 회의는 그 궁정의 상징적 표상이다. 원탁 회의란 참석자 간에 서열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중세의 기사도적 이상이란 모든 동료들을, 심지어 제후와 기사 사이마저 형제애로 묶는 것이다. 조르쥬 뒤비(George Duby)가 분석한 데에 따르면 영주와 기사 사이엔 평등한 상호 계약이 있었으니, 신종선서의 마지막 절차, 즉 지팡이를 둘 사이에 놓는 것은, 영주가 기사를 추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언제라도 영주가 부도덕한 짓을 할 경우 기사 쪽에서 군신의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처럼 당신을 둘러싼 추억의 집에도 평등성과 독립성이 특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마도 집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발언은 이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거주 공간인 아파트에 대한 성찰을 한 적이 있다(두꺼운 삶과 얇은 삶). 그 글에서 그는 아파트와 보통 집(그것을 땅집이라고 불렀다)의 차이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우선 아파트는 거주 공간이 아니라 사고양식(2361)이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 거주지는 곧 거주자의 세계관을, 혹은 거주자의 삶의 태도를 드러낸다. 아파트에서의 삶과 땅집에서의 삶은 한마디로 얇은 삶과 두꺼운 삶으로 갈라진다. 아파트에서는 모든 게 드러난다. 아파트는 평면적이고 동질적이다. 그에 비해 땅집에서는 모든 것이 자기 나름의 두께와 깊이를 가지고 있다(2364)땅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많은 것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365).

김현 선생의 집 론은 일반적인 집에 관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러나 훨씬 섬세하며, 그 섬세한 쪽에 집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의 특이성이 놓여 있다. 그는 아파트와 땅집의 차이를 아파트 건축의 획일적 모양에서 보지 않는다. 그가 주목한 것은 땅집에는 다락방과 지하실이(그리고 우물이) 있는데, 아파트에는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아파트에는 숨길 것이, 비밀이 있을 수가 없는 데 비해, 땅집에서는 끝내 간직해야 될 신비를 담고 있는 신비로운 사물함들이 감추어놓은 비밀로 가득하다.

땅집은 비밀을,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그의 시각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우선 그것은 김현 선생이 고독과 칩거를 그리워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복잡하고 거친 인간 관계에 부딪치는 현대인에게 자발적 고독은 이룰 수 없는, 그러나, 영원히 갈구되는 소망이다. 과연, 그는 화가 나서, 주위의 사람들이 미워서, 어렸을 때에 다락방이나 지하실에 혼자 들어가, 낯설지만 흥미로운 것들을 한두 시간 매만지면서 나 혼자만의 세계에 잠겨 있었을 때에 정말로 내가 얼마나 행복했던고!”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혼자만의 세계에 잠기는 것이 유폐와 고립의 선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낯설고 흥미로운 것들이라는 어사들이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어떤 신비 덩어리와의 만남이 그 꿈 안에 깃들어 있었다. 물론 그 만남이 신비(비현실적 환상)에의 침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목을 보라

"두께 없는 사물과 인간. 아파트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산다. 그러나 감출 것이 없을 때에 드러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은 감출 수도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사람은 자기가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숨겨야 살 수 있다. 그 숨김이 불가능해질 때에 사람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만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무의식은 숨김이라는 생생한 역동성을 잊고 표면과 동일시되어 메말라버린다."(365)

 

이 진술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삶은 이질적이고 상관적인 두께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질적이기 때문에 표면만 보면 안쪽의 삶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삶의 근원, 어떤 숙명, 고뇌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는 그런데 표면에만, 사회가 요구하는 것만을삶으로서 받아들이게 한다. 바로 여기에서 숨김은 역동적이라는 그의 통찰이 나온다. 숨기고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질 때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는 비밀을 간직하고 숨기는 것만이 곧 바깥과의 통화를 가능케 한다는 놀라운, 얼핏 보기에 역설적인, 발견으로 나아간다.

 

"그 가장 첨예한 상징적인 사실이 아파트에서는 채소를 손수 가꿔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아파트에서는 자연과의 직접 교섭이 거의 완전히 단절된다. 아파트에 자연이 있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자연이다. 아파트 안에서 키워지는 꽃이나 나무들은 자연의 그것이 아니라, 깊이 없는 사물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 대목의 자연을 그대로 바깥으로 치환해 읽는다. 그가 말하는 자연은 나와 다른, 혹은 규정되지 않은 자율적 존재들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서는 자연마저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다시 말해 사회적 자아로서의 나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사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가 인공적인 세상과 싸워야 하는 것은 자연의 보존과 획득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인공 세계가 말살하기 때문이다.

 

4

이제 그의 집이 어떤 가옥이었는지 어렴풋이 눈치챌 듯하다. “다락방과 지하실 때문에 땅집을 사랑한 그에게 집은 중세 기사들의 궁정이나 이동 천막은 분명 아니었다. 그곳은 그것들처럼 입주자들의 평등성과 독립성을 확보해주면서도, 땅집이라는 말 그대로 한 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안정된 장소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뿌리, 그 안정은, 다시 말해, 그 깊이는 수직의 방향으로만 내려가는 깊이가 아니라 이리저리 휘어지면서 옆으로 퍼지고 마침내는 뿌리내린 곳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의 지표면 위로 부상하는 그런 깊이였다. 그 집은 그러니, 바깥으로 안정되고 속으로 풍요하게 유동하는, 마당 깊은 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인들이 그에게서 꿈꾼 집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 집에 다녀온 다음의 내게 남은 추억 속에는 편안함, 불편함과 거북함, 즐거움이 한데 뒤섞인 채로 편안함이 불편함을, 즐거움이 거북함을 이루어 자꾸 다시 그 쪽으로 발길을 옮기게끔 하곤 하였다.

현실의 공간에서 그런 집은, 그러나, 있을 수 없다. 실제로 그런 마당 깊은 집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그 집이 모순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안으로 분열이 있으면, 그 집은 그 자체로서 끊임없이 변화를 치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 집은 여전히 그 집이다. 그 집은 아까의 인용구를 슬쩍 바꿔서 말하면, “집을 부정하는 집이다.” 집의 분해로 활력을 만들면서 여전히 집을 이루는 그 공간의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 여기에서 나는 그 집의 주 먹거리가 술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술이야기, 선생이 불꽃의 말이라고 이름붙였던 술이야기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 * *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멈출 수밖에 없겠다. 여기까지 쓰는 데만 해도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아직도 김현 선생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당신과의 인간적 교류가 인간 김현을 바라보는 데에 방해물이 되고 있다. 인간적 추억에 젖어 있는 그 만큼 나는 그의 삶의 고뇌와 실존적 깊이를 자꾸만 감상적인 그리움이나 슬픔 같은 것으로 대치해버린다.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내가 더 자라야 한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신파라니!

인용된 글들∙∙∙∙∙∙∙∙∙∙∙∙∙∙∙∙∙∙∙∙∙∙∙∙∙∙∙∙∙∙∙∙∙∙∙∙∙∙∙∙∙∙∙∙∙∙∙∙∙∙∙∙∙∙∙∙∙

1 김현 문학 전집 1, 한국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 문학과지성사, 1991

2 김현 문학 전집 14, 우리 시대의 문학/두꺼운 삶과 얇은 삶, 문학과지성사, 1993

3 김현 문학 전집 16, 자료집, 문학과지성사, 1993

4 김병익, 김현과 문지, 문학과 사회, 1990년 겨울

5 김인환, 상상력과 원근법, 문학과지성사, 1993

6 이성복, 크고 넓으신 스승, 김현 문학 선집, 전체에 대한 통찰, 나남, 1990

7 정과리, 못다 쓴 해설, 전체에 대한 통찰

8 황지우, 이 세상을 다 읽고 가신 이, 전체에 대한 통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