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예술에 대한 기능적 노미날리즘-박이문의 『문학과 언어의 꿈』과 『이카루스의 날개와 예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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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기능적 노미날리즘-박이문의 『문학과 언어의 꿈』과 『이카루스의 날개와 예술』

비평쟁이 괴리 2023. 8. 5. 05:13

문학에 대한 열정과 문학에 대한 무지가 여름 숲의 흥분처럼 기승했던 문청시절 박이문 선생님의 시와 과학은 내게 교과서와 다름없었다. 당시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겪게 마련인 이념과 예술, 생활과 진리, 그리고 이런 말을 감히 해도 좋다면 혁명과 사랑 사이의 격정적인 혼돈 속에, 시와 과학이 제공한 의식 차원존재 차원의 명쾌한 구별은, 한 줄기 인식의 뱀처럼 스며 들어와, 양자택일의 문제를 상호 반사의 문제로 바꾸어 두 차원을 한꺼번에 껴안을 수 있는 개념(conception)의 지평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철학자들의 역사에서 그이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학비평가들의 계보에서 박이문 선생님은 정명환송욱정병욱김붕구 선생님과 더불어 명징화의 세대에 속한다. 일본이라는 주렴을 통해 성기고 굴절된 방식으로 수입된 외국의 문학 개념들이 억측이라는 굴착기와 남용이라는 트랙터를 통해 한국문학의 대지를 더욱 질척거리게 만들던 때에 그이들은 개념들의 정확한 뜻과 사용의 맥락을 밝혀줌으로써 한국문학비평에 처음으로 온당한 이론적 인식의 기틀을 마련해준 분들이었다. 그이들보다 한 세대 다음의, 이른바 419세대가 감행한 주체적 한국문학을 위한 거대한 축성 사업은 전 세대의 이론적 정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었을 일이었다.

정명환 선생님이 논리적 치밀함으로 이론의 미궁에 이정표들을 설치했다면, 박이문 선생님은 평이하고 명쾌한 서술을 통해 문학의 숲으로 들어가기 위한 요약된 지도를 보여주는 안내판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적 활동 분야에는 무엇들이 있으며, 문학은 그 중 어디에 위치하는가, 시와 과학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상호 관계가 있는가, 시의 내부에 과학은 어떤 자격과 어떤 방식으로 입주해 있으며, 시는 이 타인과 어떤 명분과 어떤 방식으로 동거를 하는가 등 문학의 존재 원인과 존재 양식에 대한 박 선생님의 친절한 안내, 나처럼 어떤 재능도 수련기간도 없이 문학에 뛰어든 천둥벌거숭이이자 천덕꾸러기인 초보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 물정 모르고 선택한 사업에 대한 열정을 공연스레 더욱 불 지피시는 풀무의 역할을 하였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박이문 선생님의 독보적인 친절함은 그 동안 한결 같았으며 오늘도 변함이 없다. 두 권의 선집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해설과 인상의 강화에 기여할 게 틀림없는 반복적인 사례들로 채워져 있어서 문학과 철학의 기초를 쌓고자 하는 사람에게 아주 맞춤한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이 책들이 또한 저자의 문학에 대한 강렬한 꿈의 소산이라면, 단순히 일반적 교양을 위한 입문서로 그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학의 마력에 대한 그이의 유혹은 필경 문학을 자신만의 연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솟구치게 하기 마련이고, 그 욕망이, 이 저서들에서처럼 철학자의 지위 혹은 운명 때문에 독점의 욕망으로 연소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반성적 작업으로 경로를 변경했다 하더라도, 그 욕망의 감정물 자체는 폐기되는 법이 없이 독특한 방식으로 변이되어 철학적 탐구의 움직임을 이끄는 원천으로 작동하였을 것이다.

과연, 저자는 이 책들에서 아주 오래된 보편적인 문제를 재론하고 있는데, 주제는 늘 있어왔던 것이지만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새로운 개념틀을 통해 종합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야심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책들의 도처에서 고개를 내미는 백번을 양보하더라도라는 양보절을 돌쩌귀로 해서 저자는 친절한 해설가로부터 독창적인 사유인으로 현신(transfigurer)하는 것이다.

통상 있어왔다는 그 주제는 무엇인가? 저자가 되풀이하여 회귀하고 있는 그 주제는 철학과 예술의 관계이다. 이 관계에 대한, 그 역시 통상 있어왔던 대답은, 널리 알려져 있다. 철학은 진리를 찾고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철학은 인간의 정신 활동 중에서 인식적 기능을 담당하고 문학은 표현적 기능을 떠맡는다철학은 이성을 통해 이성의 범주를 밝히고, 예술은 감성의 에너지로 감성의 형상들을 빚는다철학은 객관적 작업이고 예술은 주관적 작업이다…….

이러한 고전적인 구별은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저자에 의하면, 붕괴는 두 방향의 균열을 통해 나타났다. 우선, 예술의 방향으로부터 철학을 자처하고자 하는 의지가 끊임없이 표출되었다. 그것은 문학이 철학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 도덕적 선악의 갈등 문제, 미적 가치, 인류 역사의 의미, 우주 존재의 의미탐구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자처의 양태는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각각, “문학 속에 철학이 들어간 경우철학의 문학적 표현”, 그리고 문학 자체가 철학적 사유를 이루는 경우이다. 다음, 철학의 방향으로부터 철학의 인식적기능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저자가 콰인, 굿맨, 로티 그리고 데리다 등의 견해를 통해 소개하고 있는 그 의혹은, “지칭 대상의 극복할 수 없는 비결정성과 언어의 근본적인 허구성으로부터 기인한다. 이러한 새로운 발견들은 철학의 독점구역들을 철거시키고 집터를 잃은 철학의 언어는 철학과 예술의 구별 불가능성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주장한다고? 왜 주장하는가? 그렇게 주장해서 철학의 집터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인가?

첫 번째 균열에서 저자가 집요하게 주목하는 부분은 문학 자체가 철학적 사유를 이루는 경우, 즉 뒤샹의 , 존 케이지의 433,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 “객관적 세계의 불확정성을 제기하거나, 혹은 언어의 기능, 혹은 그 의미의 원천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예술 작품들이다. 이렇다는 사실은 섬세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은 철학의 고유한 역할이라고 여겨져 온 진리 규명, 혹은 세계에 대한 인식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은 오히려 그러한 진리의 객관적 존재가능성, 인식의 확정 가능성, 언어의 단언 가능성 자체를, 다시 말해, 철학을 회의케 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들이 철학적 사유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과서가 가르쳐주고 있는 그런 철학적 사유가 아니다. 이들의 철학적 사유는 어떤철학적 사유이고, 어떤이 가리키는 것은 이 철학적 사유가 철학의 존재 의의에 대해 근본적인 의혹을 던지는 사유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러니까, 이 철학적 사유는 두 번째 방향의 균열을 통해 표출된 철학자들의 작업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 예술 작품들이 철학을 자처한다면, 뒤샹의 은 분명 하나의 철학이고, 이 철학은 철학의 고전적 역할을 의혹케 한다. 그렇다면, 은 굿맨의 세계를 만드는 방법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사행은 바로 반박될 것이다. 복잡한 철학적 논증을 거칠 필요도 없이, 평범한 두뇌를 가진 보통 사람의 직관을 통해서도 그것은 쉽게 부정될 것이다.

이 과감한 근접화 속에는 어떤 생략이 있다. 이 생략은 저자가 자신의 독창적인 견해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치한 숨은 지렛대이다. 그것은 교과서에서는 보기 드물겠지만 철학사를 대강 훑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철학의 회심에 대한 생략이다. 다시 말해, 철학은 언제부턴가, ‘진리의 사도이기를 포기했다는 것, 그 대신 진리에 대한 주장들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작업에 만족하기 시작했다는 것 말이다. 그러한 회심이 논리실증주의에 의해 완성되고 그럼으로써 철학의 고유한 영역이 재설정됨으로써 확보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논리실증주의는 철학을 부정한 대가로 철학을 구출하였다.

독자는, 가령, “다른 과목들이 각기 인식 대상의 차이에 근거한 개념인 데 반해서 철학은 어떤 대상에 접근하는 논리적 지평에 근거한 개념혹은 철학이 뜻하는 것은 어떤 담론에 사용되는 개념분석이다같은 대목들을 읽을 때 저자의 철학이 논리실증주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자신의 계보를 강화하는 방향에서 철학과 예술의 구분에 관한 생각을 전개해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는 대신 자신의 정체를, 감춘 것은 아니지만, 무심하게 지나갔다. 그냥 지나간 것은 아니다. 저자 자신의 계보적 맥락을 무심하게 대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논리실증주의 일반에 대한 비판적 인식 때문이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논리실증주의 역시 철학의 깊은 전통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논리실증주의가 진리의 해명을 포기했다 하더라도, ‘인지적작업을 철학의 역할로 지켜냈고, 따라서 그것은 전통 철학의 형이상학적 본질주의인식론적 기저주의의 테두리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그러한 생각은 논리실증주의적 언어의 메타 분석이 철학과 문학의 차이를 인지적 명제와 비인지적 명제의 구분에 비추어 설명했을 때 철학과 문학의 구별은 보다 세련되고 선명하고 논리적으로 굳건한 이론적 뒷받침을 받았다는 것이 의심되지 않았다는 진술에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논리실증주의의 공인된 대표자들이 철학과 여타 부문과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사실이다. , 콰인은 모든 인식 및 이해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총체적(holistic) 테두리에서 이루어진다고 파악함으로써 철학과 여타 학문, 특히 과학과의 경계를 허물었고, 굿맨은 예술의 기능을 언제나 인식적으로 봄으로써 예술과 철학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콰인과 굿맨의 변화된 입장들이 논리실증주의의 필연적 귀결인지, 아니면 그로부터의 이탈인지에 대한 논의는 배제되어 있다. 저자는 이 양자를 각각 별개의 현상으로 다룬다. 그 태도에는 이중의 환원이 작동한다. 우선, 저자가 논리실증주의를 전통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파악하는 순간, 논리실증주의는 형이상학적 본질주의와 인식론적 기저주의로 환원된다. 이 방향에 철학과 예술을 실체론적으로 다르게 파악하는 태도가 놓인다. 다른 한편, 저자는 콰인과 굿맨의 태도를 하이데거, 로티, 데리다 등의 태도들과 동일시하고, 이 태도들 전체를, 저자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으로 간략하게 요약하는, 예술과 철학의 구별을 부정하는 태도 일반으로 환원한다. 이 환원을 통해, 가령 굿맨이 상징적 지시(symbolic denotation)’, ‘예시(例示, exemplification)’, ‘형상적 지시(figurative reference)라는 용어들을 통해 여타 부문과 예술을 구별하려한 시도는 무시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굿맨이 예술의 특수성에 최대의 인지적 기능을 부여한 것은 틀림없으니까 말이다.

이 이중의 환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도출된다. 첫째, 철학과 예술에 대한 실체론적구별이 폐기된다. 둘째, 철학과 예술에 똑같이 인지적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철학과 예술을 구별하지 않는 태도 역시 비판된다. 마지막으로 철학과 예술을 실체론적으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구별하는 태도의 길이 열린다. 바로 이 세 번째 길의 열림이 앞에서 말한 생략의 궁극적인 효과이다.

다른방식, 그것은 양상론적방식이다. , “문학과 철학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며] 그 구별은 전통적인 [……] 사실적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양상이라는 언어 사용의 한 논리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양상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그것이 논리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실제 풀이를 들어보면,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이고, 더 나아가, 제도적이다. 그 풀이의 핵심적인 대목을 들어보자예술과 미는 다른 것이며, “예술과 미의 구별을 지각으로만 구별할 수 없는 이상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예술의 정의는 실제적 즉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예술이란 문화적으로 예술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수한 기능이 부여된 모든 것을 지칭한다. 문화는 일종의 제도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제도적 물건이다. 이와 같이 볼 때 다른 것들로부터 예술 작품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술이 수용되는 제도를 안다는 말이며, 예술이라는 제도적 작품을 안다는 것은 예술적기능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한 앎을 의미한다.”

저자에 의하면, 예술은 예술이라고 명명될 때 그에 고유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예술에 대한 명명은 원초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적인 것 즉 사회적 필요에 의해 사회적 기능이 설정된 사회적 약속에 속하는 것이다. 그 제도적 기능은 무엇인가? 우선은 그것은 인지적인 것이 아니다. 논리적인 차원에서는, 하나의 예술 작품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인지적인 한 상반된 진리들을 여러 개 포함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제도적인 차원에서는, 예술이 과학처럼 인지적이라면 과학이 더 우월한 인지 양식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지 양식으로서의 예술은 불필요하다. 다음, 따라서 예술의 제도적 기능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인지적인 것이 아니라, 논증과 검증이 불가능한 새로운 인지적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것이다. 예술이 보이는 세계는 과학이 보이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가설적혹은 잠정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허구적 존재이거나 세계이다.” 이러한 허구적 세계가 왜 필요한가? 저자의 답변은 명쾌하다. “이러한 예술적 기능을 통해서 우리는 낡은 패러다임을 반성해보고 그것의 적절성을 재평가하고, 그것이 억압적으로 의식됐을 경우 그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하면서 사물 현상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진리를 부단히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혁명적이며 해방적 기능을 담당하고 그런 의미에서 자유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인간의 초월성을 가장 잘 구현한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우리는 예술에 대한 기능적 노미날리즘(nominalism)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기능적 노미날리즘은 예술을 인지 행위로 보지 않고 새로운 인지적 패러다임의 제안행위로 본다. ‘제안은 주목해야 할 핵심 용어이다. 왜냐하면, 그 용어는 예술 행위가 제도의 울타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을 비롯한 비예술적 사물 현상에서 느끼는 미적 경험은 근원적 행복에 대한 우리들의 생물학적 욕망에 기인한다. 이와 반대로 예술 작품에서 느끼는 미적 경험은 관념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정신적 욕망에 근거한다라는 저자의 미묘한 발언은, 기능적 노미날리즘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이 해방의 경험이라기보다 해방에 대한 구상이자 그 구상의 제출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예술의 제도적 기능은 그러니까 제도 내부의 자기 갱신 운동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 안에서 제도 밖을 시험하는 운동이다.

이제 저자의 야심적 기획은 명쾌한 윤곽을 완성한 듯하다. 저자는 예술의 특성적 측면, 즉 논리가 아닌 형상의 측면에 근거해 철학과 예술을 동시에 구출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 한편으로, 철학과 예술의 양상적 구별을 통해 예술이 철학을 침범하는 경로를 차단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예술을 단순히 현실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생물학적욕망으로 두지 않고 예술의 철학적 성격을 보존하였다. 예술과 철학은 양상적 차이를 통해 존재론적으로 동렬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독자는 한 가지 의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양상적 구별을 통해, 예술과 철학을 똑같이 인지 행위로 보는 현대 철학의 관점을 비판했을 때, 그것은 예술이 철학을 침범하는 경로를 차단했을 뿐이 아니라 동시에 철학이 예술을 침범하는 경로를 차단한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철학이 예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누른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들, 예술이 철학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철학이 예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저자의 관점에서 예술이 철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한계가 설정됨으로써 보존되었다. 반면 철학이 예술이 되고자 하는 욕망, 즉 저 쇼펜하우어로부터 하이데거사르트르를 거쳐, 라깡데리다로 이어지면서 문체로써 더 나아가 철학의 사행(事行) 자체로써 실행된, 철학이 스스로 예술적 경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이 책들에서 생략되었다. 그 생략과 더불어, 이 욕망들의 근원에 대한 질문도 생략되었다. 이것은 저자의 두 번째 생략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왜, 어디로부터 오고, 언제, 어디에, 어떻게 출몰하는 것인가? 가령, 굿맨이 예술을 인지 행위에 포함시키고 더 나아가 가장 심오한 인지 행위로 지칭하였을 때(왜냐하면 굿맨에게 있어서, 형상적 현실은 진짜 현실이니까), 그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현실의 확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현실에 의해서 다시 말해 제도에 의해서 인정되지 않은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현실이라고 명명하는 주체의 욕망은 무엇인가? 반대로 그것을 제안이라고 명명하는 저자의 욕망은 무엇인가? 아마도 철학사의 동선을 달리 잡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들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쉽게도, 오늘의 서평에서 거기까지 나아가기는 힘들 듯하다.

󰏔 2003. 12. 3, 업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