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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1.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정현종 시인은 신천옹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시인이 그러하지만 정현종 시인은 특히 그렇다. 그 증거는 그의 시에 있다. 그는 한국의 대부분의 시인들이 고통을 토설할 때에 행복을 노래하고, 그럴 권리를 거듭 주장하였다. 그것은 그가 낙원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정현종이 전하는 낙원의 기억은 그러나 인간의 언어로 발설될 수가 없고 인간의 지능으로 해독되지 않는다. 그것을 전달하는 매질은 언어이되 언어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천상적 삶의 물질적 실물들로서 나타난 것들이다. 천상적 생의 형상이란 삶의 적나라하고 구체적인 실상으로부터 오는 실감을 담았으되 그것들을 담뿍 소화하여 맑게 정화하는 운동 그 자체로서 드러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것은 곧 가장 깊이 드나들면..
김광규의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문학과비평사, 1988)를 읽으면서 나는 김주연에 의해 명명된 후, 그의 시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범속한 트임’의 의미를 되묻는다. 널리 알려져 있듯, 시인이 그리는 세계는 이른바 소시민적 일상의 세계이다. 그 세계에는 한편으로 강압적이거나 혹은 은밀히 조직적인 권력의 억압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억압에 의해 알게 모르게 숨막히고 주눅들어서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진 사람들과 사물들이 있다. 시인은 그러한 삶에 맥없이 이끌려다니는 사람들의 상태를 전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하며, 쓰라린 결핍과 지저분한 잉여를 동시에 낳는가를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폭로와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일상인의 삶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사용..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이른바 세계인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군사 쿠데타가 두 군데서나 터졌다. 귀가 멍멍한 판에 나는 또 하나 고막을 진동시키는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정현종의 「천둥을 기리는 노래」가 그것이다. 소리의 크기로 치자면 천둥만한 것이 있겠는가. 하늘이 울리는 소리이니 말이다. 하지만 요란하지도 그악스럽지도 않다. 하늘이 울리는 소리니 맑고 드높을 밖에. 한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은 그게 설사 하늘이거나 괴물일지라도 인간의 은밀한 욕망이 새겨진 것이 아닐 수 없으니 그 놈이 어느 연금술로 주물(鑄物)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게 유익하리라. 시인이 기리는 천둥은 지난해(1987) 여름 “천지 밑빠지게 우르릉대던” 민주화운동이다. 시인은 “항상 위험한 진실”이고 “죽음과 겨루는 나체”인 그..
『결정본 김지하 시전집』(도서출판 솔, 1992)이 출간되었다. 편자와 시인에 의하면, ‘결정본’이 필요했던 이유는, 시인의 “복잡하고 험했던 인생 탓에” 방치될 수밖에 없었던, 기존 시집들의 편집·교정의 오류들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 한다. 편집자는 「편집자 일러두기」에서 그 내력을 얘기하고, 2권 말미의 「편집자 주」에 그 세목들을 밝혀놓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이 김지하 시의 이해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김지하의 초기시와 후기시 사이에는 지금까지 알려져왔던 것과 같은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는 것일 것이다. 황토 이전과 황토 이후로 나뉨당했던 김지하의 초기시들은 모두 황토와 같은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황토는 그 중 정치적 효용성이 강한 것들을 뽑아..
박이문 선생은 가장 혹독한 삶을 치러낸 세대에 속하는 한국인이다. 그들은 축복 속에서 탄생하지 못했으며 안식할 미래가 손짓하지도 않았다. 식민지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해방과 더불어 공부하는 청년이 되었으니, 바로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전 세대만큼 식민지 제도에 침윤되지 않았다는 점만 달랐을 뿐, 새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어떤 자원도 없는 상태였다. 한반도는 강대국의 관리 하에 들어갔고 곧바로 전쟁에 휘말렸다. 휴전 후 모든 것이 폐허인 상황에서 넝마를 줍듯 희망의 조각들을 힘겹게 줍고 기웠다. 평안은 오직 찬송가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현실은 그냥 비명 그득한 도가니였다. 그 안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겐 시시각각이 사생결단의 순간이었다. 실존주의란 말이 유행한 소이였다는 말을 ..
김수영은 굳은 통념, 상투화된 지식을 경멸하고 경계하였다. 그의 마지막 시 「풀」을 민중의 질긴 생명력에 대한 비유로 보는 견해가 매우 그럴 듯해서 지배적인 통념으로 자리잡은 것은 얼마간은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모든 풀이 질경이는 아닌 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임우기씨의 새로운 해석(「巫 혹은 초월자로서의 시인―김수영의 「풀」을 다시 읽는다」, 『현대문학』, 2008.08)은 무더운 여름의 소나기와 같은 상쾌함을 선사한다. 더욱이 시인의 언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에 이 기발한 해석은 충격적이기조차 하다. 시인은 전 생애를 걸쳐 ‘현대’를 나침반으로 삼았고 ‘현대의 명령’에 의거해 시의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임우기씨는 현대가 아니라 ‘신화’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현대와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