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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속한 트임’의 의미 -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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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속한 트임’의 의미 -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비평쟁이 괴리 2024. 1. 8. 17:23

김광규의 시선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문학과비평사, 1988)를 읽으면서 나는 김주연에 의해 명명된 후, 그의 시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범속한 트임’의 의미를 되묻는다.
널리 알려져 있듯, 시인이 그리는 세계는 이른바 소시민적 일상의 세계이다. 그 세계에는 한편으로 강압적이거나 혹은 은밀히 조직적인 권력의 억압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억압에 의해 알게 모르게 숨막히고 주눅들어서 왜소해질대로 왜소해진 사람들과 사물들이 있다.  시인은 그러한 삶에 맥없이 이끌려다니는 사람들의 상태를 전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하며, 쓰라린 결핍과 지저분한 잉여를 동시에 낳는가를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폭로와 비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일상인의 삶을 비추어보는 거울로 사용하고 있는 ‘자연’이 실은 일상인의 삶으로부터 생성된 것임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현대의 소시민들, 즉 주어진 삶을 맥없이 수락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날의 평범한 경험들에서 삶에 대한 지혜를 얻는데, 그 경험들이 쌓여 굳어지면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그만큼 자연스러운 삶이 되고, 그 자연스러운 삶은 곧 세계의 원리 자체와 동일시된다. 그 동일시가 어느 정도냐 하면, “일찍부터 우리는 믿어 왔다 / 우리가 하느님과 비슷하거나 / 하느님이 우리를 닮았으리라고”(「도다리를 먹으며」)에서처럼, 자기 외부에 자신과 닮은 절대적 세계를 만들어낼 정도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로 떨어져 나간 그 삶에 자연(nature), 즉 당연함(the natural)의 의미를 부여한 후, 다시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비추고 그것에 자신을 맞춘다.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선명히 새겨지고 빈부가 갈라져 있는 세계에 대해, “인생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지 / 하지만 누구나 자기 길을 가는 거니까”(「늦깎이」)라고 체념하고 자위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체념과 자위 속에는 세계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고, 세계를 움직일 수 없는 대신에 나는 열심히 움직여서, 언젠가는 세계가 암시하는 풍요와 힘의 버스에 올라탈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러나 버스는 결국 오지 않고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는 파국을 맞는다.
그러니까 김광규의 ‘범속한 트임’은 어떤 일상적 경험에 비추어 다른 일상적 경험을 비교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고, 이념에 비추어 경험을 재는 데에서도 나오지 않으며, 일상적 삶에 대한 믿음이 그 자체로서 자기 배반의 결과를 낳고야 마는 불가역적 과정을 꿰뚫어 제시하는 데서 나온다. 아니, 그 이상이다. “산에서 살고 싶은 마음 / 남겨둔 채 떠난다 그리고 / 크낙산에서 돌아온 날은 / 이름없는 작은 산이 되어 / 집에서 마을에서 / 다시 태어난다”(「크낙산의 마음」)가 보여주듯, 그의 ‘범속한 트임’은 그 자기배반을 한복판에서 감당하여 극복하려는 의지를 잔뜩 곧추세우는 힘이기도 하다. (쓴 날: 1988.07.22, 발표: 『동아일보』 1988.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