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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아래 글은 제55회 동인문학상(2024)의 첫 번째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의 홈페이지에서 1차 독회의 결과에 대한 이영관 기자의 요약기사( 유머는 있으나 웃을 수가 없고 순간은 사라졌으나 잔상이 남네 (chosun.com))와 심사위원 전체 의견 전문( [동인문학상] 1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chosun.com)) 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올린다. 프랑스의 정신의학자이자 작가인 프랑수아 를로르François Lelord는 『엑토르는 새 인생을 살려고 한다』(Odile Jacob, 2014)라는 소설에서 정신과 의사인 주인공의 입을 빌려, 세상 사람들을 두 종류로 분류하고 있는데, ‘감염병’으로 존재하는 자와 ‘감염되는 자’가 그 둘이다. ..
※ 아래 글은 제55회 동인문학상(2024)의 첫 번째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의 홈페이지에서 1차 독회의 결과에 대한 이영관 기자의 요약기사( 유머는 있으나 웃을 수가 없고 순간은 사라졌으나 잔상이 남네 (chosun.com))와 심사위원 전체 의견 전문( [동인문학상] 1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chosun.com)) 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올린다. 아주 오래전 청소년을 위한 철학동화로 베스트셀러가 된 『소피의 세계』에서 저자 요슈타인 가아더는 ‘대위법’이라는 장에 “두 가지 이상의 멜로디가 동시에 울려 퍼진다”라고 쓴 적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대위법의 핵심을 짚었다는 점에서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점은 대위법에서는 둘 이..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1990)은 이성복의 세번째 시집이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와 『남해 금산』을 거쳐 그가 다다른 이번 시집의 세계는 그의 시적 주제는 이전과 변함이 없는데, 그의 시적 관점은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의 시는 언제나 고통과 평화 사이에 있었다. 시인은 말한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장 더러운 진창과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정결한 나무들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들이 모두 다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함께 있지 않아서 일부러 찾아가야 한이 그것들 사이에 찾아야 할 길이 있고 시간이 있다”(「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시는 언제나 고통과 평화를 함께 찾아가는 시간이며, 길이었다. 그 시간은 그러나 수많은 나날과 수없는 고장을 ..
아마도 누구나 한번 쯤은 어느날 골목길을 무심히 지나다가 아스팔트를 비집고 풀이 돋아난 것을 보았을 때 문득 생명의 경이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동을 “얼랄라/저 여리고/부드러운 것이!”하는 즉각적인 언어로 직역해낼 줄 아는 사람은 소수의 언어마술사들 뿐이리라. 생각해보면 그런 탄성은 누구나 낼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지극히 상투적일 수도 있을 법한데, 그러나 시인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마음의 언어를 날 것 그대로 이끌어냄으로써 놀램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생명의 경이라는 게 저 드높은 곳에 살고 있는 어떤 백익조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아주 친숙한 것임을, 아니, 그렇게 친숙하게 받아들여야만 생명의 경이로움을 스스로 실천할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최석하의 『희귀식물 엄지호』(문학과지성사, 1996)는 첫 시 제목을 그대로 시집 제목으로 쓰고 있다. 제목에 등장하는 엄지호씨는 평범한 공무원인데 “숱한 남의 자식 키워 장가보내는” 선행을 말없이 실천하며, 해마다 벚꽃 만개일을 수첩에 꼬박꼬박 적어두는, 요컨대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다. 이 엄지호씨에게 시인은 ‘희귀식물’이라는 별명을 단다. 헌데, 하필이면 왜 ‘식물’일까? 다시 말해 희귀 인종 엄지호, 천연기념물 엄지호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꼭 식물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있는가? 야릇하게도, 첫 시만을 빼고 다른 시들은 식물적이라기보다 차라리 동물적이다. 시인이 그리는 세상은 날이면 날마다 “전쟁 또는 파괴 그 자체”가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낚시꾼들이 무심코 내던지는 라면봉지들, 깡통들이 바다..
김종철의 『못의 귀향』(시학, 2009)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세계이다. 이야기는 대체로 옛날의 신산한 삶을 애틋이 회상하는 일을 한다. 그 점에서 이야기는 위로와 용서, 거둠과 정돈의 역할을 하는 것, 다시 말해 격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을 넉넉히 받아들이게 하는, 통풍 잘 되는 바구니 같은 것이다. 독특한 것은 그의 이야기가 은밀하게 두 이야기로 겹쳐져 있다는 것이다. ‘삶 이야기’와 ‘말 이야기.’ 그것은 그의 ‘삶 이야기’가 충분히 다스려지지 않는 데서 나온다. 즐겁게, 흔감히 추억하지만 뭔가가 못에 걸린 듯 떨어져 그 스스로 못이 되어 몸의 어느 구석을 슬그머니 찌른다. “못의 귀향”은 ‘못의 귀환’이다. 가령, 식구들이 “밤새 잘 발라 먹은 닭뼈”라든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