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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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된 해석과 결정본의 욕망

비평쟁이 괴리 2023. 12. 26. 23:50

김수영은 굳은 통념, 상투화된 지식을 경멸하고 경계하였다. 그의 마지막 시 「풀」을 민중의 질긴 생명력에 대한 비유로 보는 견해가 매우 그럴 듯해서 지배적인 통념으로 자리잡은 것은 얼마간은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모든 풀이 질경이는 아닌 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임우기씨의 새로운 해석(「巫 혹은 초월자로서의 시인―김수영의 「풀」을 다시 읽는다」, 현대문학, 2008.08)은 무더운 여름의 소나기와 같은 상쾌함을 선사한다.
더욱이 시인의 언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에 이 기발한 해석은 충격적이기조차 하다. 시인은 전 생애를 걸쳐 ‘현대’를 나침반으로 삼았고 ‘현대의 명령’에 의거해 시의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임우기씨는 현대가 아니라 ‘신화’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현대와 신화만큼 멀리 떨어진 것도 없을 것이다.
어찌 됐든 다양한 해석은 시의 이해를 풍요롭게 하며, 그 점에서 시인의 주장에 반하는 해석마저도 용인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상상의 빗장을 열어젖힌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떤 고착이 개입해 있을 수 있다. 우선 독자는 해석의 과장을 의심한다. 임우기씨는 단 하나의 구절을 근거로 단군신화에서 천지인 조화의 세계관을 추출한 후, 그 해석의 틀을 시의 시각적 형상에 유추적으로 대입하였다. 신화 해석은 과잉되었고 시적 대입은 다분히 기계적이다. 이런 방식은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에는 매우 위험한 판단이 된다. 야만인을 기다리기 위해 광장에 동원된 사람들을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간구인들로 이해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오해가 가능한 것은 모여 있는 모습 자체가 조화와 평화의 이미지로 쓰이기 때문이다. 임우기씨는 이런 해석의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한국의 문학비평 및 문학 교육의 근본적인 고질과 관계가 있다. 이렇게 의미의 틀을 미리 짜 놓고 시를 해석의 그물 안에 가두는 것은 시를 읽는 좋은 태도는 아니다. 문학은 세상에 대답을 주는 도구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 질문하게끔 하는 힘이다.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모든 길들이 최단거리로 뚫린 세상에 대해 반성과 회의의 제동장치를 작동시키는 운동이다. 바로 그 점에서 시는 그 의미를 해독해야 할 게 아니라 그 생기를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결정적인 해석을 제공하지 못해 안달한다. 한국의 문학 교과서는 그런 결정판들의 집대성이다. 그 교과서 앞에서 생전의 김춘수 선생은 자신의 시를 두고 겨우 40점을 맞았다. 「풀」을 단군신화의 시적 변용으로 보는 이런 시도 역시 결정적 해석의 욕망에 불타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해석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단지 해석하는 과정이 동시에 의혹을 촉발하는 과정이 되는 게 문학 이해의 본령임을 지적할 뿐이다. 세상은 언제나 의미와 무의미, 대답과 질문, 관념과 실존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며, 그걸 일깨우는 게 문학의 몫인 것이다. (20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