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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감격과 내면의 연금술— 정현종의 「천둥을 기리는 노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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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감격과 내면의 연금술— 정현종의 「천둥을 기리는 노래」

비평쟁이 괴리 2024. 1. 3. 02:42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이른바 세계인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군사 쿠데타가 두 군데서나 터졌다. 귀가 멍멍한 판에 나는 또 하나 고막을 진동시키는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정현종의 「천둥을 기리는 노래」가 그것이다.
소리의 크기로 치자면 천둥만한 것이 있겠는가. 하늘이 울리는 소리이니 말이다. 하지만 요란하지도 그악스럽지도 않다. 하늘이 울리는 소리니 맑고 드높을 밖에. 한데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은 그게 설사 하늘이거나 괴물일지라도 인간의 은밀한 욕망이 새겨진 것이 아닐 수 없으니 그 놈이 어느 연금술로 주물(鑄物)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게 유익하리라.
시인이 기리는 천둥은 지난해(1987) 여름 “천지 밑빠지게 우르릉대던” 민주화운동이다. 시인은 “항상 위험한 진실”이고 “죽음과 겨루는 나체”인 그것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사람이” “왼통 새벽빛으로 물들었겠느냐”고 감복한다. 
그러니 분명 이 시는 6월 항쟁에 대한 찬가이다. 제목도 “기리는 노래”가 아닌가? 그러나 실제 이 시의 핵심은 바깥의 감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내면의 변화에 있다. 그는 바깥의 감격에 전염적으로 도취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자기 몸에 스며들어 자신의 “엉거주춤과 뜨뜻미지근 / 마음없는 움직임에 일격을” 가하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묘사한다.
우선 소리라는 분산성의 물질을 응집시켜 일용할 양식으로 만든다. 보라, 그는 맑고 드높은 소리를 “맑은 피”와 “드높은 음식”이라고 명명하지 않는가. 그 다음 그 소리의 양식을 먹는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다른 시를 빌리자면 “시인은 하여간 / 남의 상처에 들어앉아 / 그 피를 빨아 사는 / 기생충이면서 아울러 스스로 또한 숙주”이어서 남의 살을 “열심히 먹어 부지런히 / 피를 만들고”(「두루 불쌍하지요」)는, 그 피를 상처의 그릇에 담아 다른 이에게 먹거리로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저 “맑은 피”와 “드높은 음식”은 너와 나의 피로 버무러져 만들어진 것이다.
시인의 시는, 그러니 “화끈거리”는 “불순한 비빔밥”이 되지 않을 수없다. 그 비빔밥이 비벼지는 과정에서 시인은 천둥소리에 귀먹는 것이 아니라(당연히 맑은 피의 눈부심에 눈머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마름하는 치수로 [함께] 출렁거리고” 싶어지는 것이며 저 천둥을 삼키는 자신의 입의 운동이 “가난한 번뇌[를] 입이 찢어지게 / 우르릉거리는 열반”으로 뒤바꾸는 작업이 제 “노래와 인생의 주조(主調)로” 흐르길 꿈꾸는 것이다.
마름하는 치수로 출렁거리고 싶어하는 시는 스포츠처럼 욕망을 순화시키지도 않고 쿠데타처럼 욕망을 욕심화하지도, 즉 폭발과 억압을 동시에 저지르는 짓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을 연다. 욕망으로 하여금 허심탄회하게 스스로를 말하게 하고 욕망들끼리 화창하게 하며, 그래서 그것들 각자의 지배 욕구를 걸러내게 한다. 이제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불순한 비빔밥”인 그의 천둥소리가 왜 맑고 서늘하며 “길의 눈부신 길없음”으로 우리 귀 안으로 아득히 퍼지는가를. (쓴날: 1988.08.22, 발표; 『동아일보』1988.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