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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올리비에 불누아(Olivier Boulnois)의 『존재와 재현 Être et représentation』(PUF, 1999)을 쉬엄쉬엄 읽는다. 13세기 말엽의 망각된 중세 신학자 던스 스코트(Duns Scot)의 저작에서 근대적 사유의 기원을 찾고 있는 책이다. 개요는 이렇다. 아랍을 우회하여 들어 온 아리스토텔레스는 종래 유럽의, 그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했던, 신학의 기본 개념들을 결정적으로 대체한다. 첫째, 순전히 사실의 수용만을 담당했던 인식에 의도성과 상상이라는 새로운 기능들이 첨가된다. 그럼으로써 진술이 사실과 일치하는가가 아니라 재현 가능성이 진리의 표지가 된다. 둘째, 재현자로서의 존재는 일의적이라는 것. 이로써 신과 인간의 통로가 열린다. 셋째, 지능은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남풍을 위한 노래 오 남풍이여, 어서 와 눈을 마셔줘오. 우리는 얼음과 바람으로 배가 불러요. 다감한 민들레가 흙에서 뽑아내요. 황금빛으로 아롱이는 아주 조그만 햇살 하나를. 오 남풍이여, 어서 와 눈을 마셔줘오. 우리는 추위와 비로 배가 불러요. 데이지 한 송이 있어 흙에서 뽑아내요. 피를 촐촐 흘리는 아주 조그만 햇살 하나를 오 남풍이여, ‘사랑’ 신이 그대를 보호해 주시길 기원해요. 우리는 모두 배고프고 행복에 굶주렸다오. 새싹 눈은 모두가 겁먹은 채로 엿보고 있다오. 그대가 쪽빛의 숨을 들이켜 눈을 마시기를 CHANT POUR LE VENT DU SUD O brise du Sud, viens boire la neige, nous sommes repus de gel et de vent, un dou..
20세기 중반기를 풍미한 프랑스의 사상가․문학인들 중에 카뮈Albert Camus만큼 한국 독자의 폭넓은 사랑을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셍-텍쥐페리Saint-Exupéry는 청소년을 위한 작가였고, 보브와르Simone de Beauvoir는 여성들의 작가였다. 말로André Malrlaux는 명성보다 훨씬 적게 읽혔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나 그 영향은 지식 사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카뮈만이 유일하게 계층과 직업과 성별이 편중되지 않은 애독자를 가진 작가이다. 왜 그러할까? 태양의 눈부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뫼르소Meursaut(『이방인L'étranter』)의 돌출한 행동 때문에? 아니면 역병이 만연한 도시에서 순교자적 열정으로..
Microsoft Bing에서 AI 검색 엔진이자 장치로 Copilot을 가동하고 있다. 어제 ‘실존’이라는 단어의 사용사를 검토하려고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를 다시 읽다가, 그 작품 안에서 자살한 박운삼이라는 시인이 실존인물인지 궁금해서 Copilot에게 물어보았다. 일시는 2023년 11월 16일 오후 1시경. 질문 장치: Internet Brower Microsoft Bing이 장착한 Copilot 질문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1951년에서 1952년 사이에 자살한 20-30대의 한국 남성 시인이 있는지 찾아봐 줘.” 다음과 같은 대답이 왔다. (어제 일이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서 대강의 내용만 전함) “1951년에서 1952년 사이에 자살한 20-30대 한국 남성 시인은 검색되지 않습니다. 그..
성모께 드리는 기도 지고한 사랑이여, 제 말을 들어주소서. 제가 당신을 어디에서 맞이했는지 알지 못하고 그대의 처소가 어느 태양인지 알지 못하고 어느 옛날에 당신의 시계로 어느 때에 제가 당신을 사랑하였는지 모를 수도 있겠지만요. 제 기억을 꿰뚫고 계신 드높은 사랑이여 . 제 삶을 만들었던 화로 없는 불길이여, 어느 운명으로 저의 생애를 가로지르시고 어느 꿈결에 당신의 영광을 마주 보았는지 오 저의 안식처여… 언젠가 제가 길을 잃어버리고 무한 심연 속에서 갈라지는 날이 올지라도 무한히 제가 부숴져 저를 입혀준 오늘이 저를 배반하는 날이 올지라도 우주에 수천의 조각으로 몸이 찢겨 나가도 수많은 순간들에도 다시 합치지 못한다 해도 하늘에 뿌려진 한 줌 재에서 잡티 털어낸 허무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어느 낯선 ..
이 책(윤호병 역, 문예출판사)은 온건하고도 논쟁적인 저서, 아니, 온건하기 때문에 논쟁적인 저서이다. 뒤에서부터 말하자. 왜 논쟁적인가? “서구에서 문학비평은 문학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소원과 함께 출발하였다”는 도발적인 첫 문장에 그 논쟁의 핵자가 숨어 있다. 문학을 소멸시킬 것을 주장한 그 문학 비평이 바로 플라톤의 『공화국』이라면, 그 주장과 함께 출발한 것은 또한 철학에 의한 문학의 지배의 역사이다. 플라톤은 시인을 추방하려고 했고, 칸트는 문학을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떼어내어 “지옥의 변방으로 이동”시켰으며, 푸코․데리다 등의 현대철학자들은 문학을 전문가들만의 “복잡미묘한 놀이와 쾌락”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단토(Danto)의 용어를 빌어 “철학적 권리박탈”이라고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