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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제목이 수상하다(강지수 외 『문학과 철학의 만남』, 민음사, 2000). 문학과 철학의 만남? 언제 그들이 안 만난 적이 있던가? 적어도 문학 쪽에서 보면 아니다. 50년대의 실존주의, 60년대의 한국의 이념형에 대한 탐구, 70년대의 비판 철학, 80년대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90년대의 해체 철학은 모두 문학의 마당에서 문학의 몸을 통해 표출된 것들이었다. 현대의 한국문학은 철학하기,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간구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뜬금없는 게 아닐까? 아니다. 어떤 불길한 징후가 이 책에 실린 글들을 뭉치게 하고 있다. 그 징후는 셋이다. 우선 문학 쪽에서. 언제부턴가 한국문학은 철학을 떠나고 있었다. 진리의 울타리를 뚫고 나가 환상의 대 열락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장경..
이제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리 많은 사람들이 이제 빛이 파닥이는 걸 보지 못하리. 봄날 아침의 미묘한 광채도. 다정한 햇살이 앵초 꽃잎을 살짝 열어보지만, 헛되리. 나는 스무 살도 안 돼 죽은 젊은 영혼들을 생각하네. 운명이 겨우 삶의 맛을 본 저들을 어둠 속에 눕히네. 늙은이들과 여인들은 바라보리. 저 곱은 손들 안에서 사그러드는 불꽃을. 신성한 불길들이 꺼져가는 것도. 하지만 이들은 다시 살아나누나. 그러나 저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이 신비를 알아보지 못하리. 저 옛날에 기쁜 날에 그들을 사로잡았던 그것을. 태어나는 새싹들에 빛 줄기 하나만 놓일 때. 어린 나무에 꽃이 필 때거나, 푸른 하늘이 펼쳐질 때의 그 홀림을. 저들은 더 이상 감미로운 열락을 느끼지 못하리. 저 옛날 오직 아름다움만이 숨결을 ..
마르트 로베르Marthe Robert는 한 손에 카프카를 다른 손에 프로이트를 들고 있었다. 그는 카프카의 작품이 얼마나 재미있는가를 프랑스인들에게 알려준 번역자였으며, 『정신분석의 혁명:프로이트의 생애와 작업』을 써서 라깡으로부터 “최고의 프로이트 전기”라는 상찬을 받은 정신분석학자였다. 『기원들의 소설과 소설의 기원Roman des origines et origines du roman』(김치수․이윤옥 역, 문학과지성사, 1999)은 저자가 손에 든 두 개의 도구를, 때로는 심벌즈처럼, 때로는 캐스터내츠처럼, 그리고 때로는 부싯돌처럼 맞부딪쳐 이루어낸 뛰어난 화음과 번뜩이는 인식의 책이다. 프로이트에서 라깡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정신분석이론의 ‘계몽’을 위해 소설을 수단으로 활용한 것과..
노래 박쥐의 비상, 음흉히, 불안한 눈길로, 기괴하게 헤어진 날개를 파닥거리며 오고, 가고, 횡행한다. 그대 찰나라도 느끼지 않았니 ? 허망한 고통에 푹 빠진 내 영혼이 미친듯이 달려드는 것을, 그대 아득한 입술을 향해. 뚜렷이 보이네 틈만 나면 너는 악덕을 범하는 기묘한 솜씨를 발휘하나니, 그리고 너는 욕망의 불을 지펴놓고는 뒤통수 치는 데는 귀신 같아, 재빨리도 몸을 빼는구나. 이불 냄새와 네 양장에 뿌린 향수가 뒤섞여 너의 매혹적인 금발은 엿같이 엉겨 칙칙해진단다. 너는 거짓과 꾸밈만을 좋아해. 달콤한 말들과 교태로 간지럼을 떠는구나. 너는 키스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그저 스치기만 하지. 네 눈은 파리하게 빛나는 겨울별들 같아. 장례행렬이 우중충히 네 발자국을 따라다닌다네. 네 몸짓은 그림자..
목차만을 따라 읽으면 그 책의 전반적인 구도가 선명하게 머리 속에 펼쳐지는 서적이 있다. 완독하고 난 다음에는 책의 내용까지도 차곡차곡 재기억된다. 『언어와 이데올로기』(Olivier Reboul 저, 홍재성․권오룡 역, 역사비평사, 1994)는 그런 책이다. 교육 철학자의 신념이랄까, 방법론이랄까 하는 것이 완벽하게 적용된 범례이다. 이러한 명료성은 그러나 단순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관되고 세밀한 분류, 섬세한 논증, 그리고 가능한 반론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 등 잘 압축된 풍요함과 어울리고 있는데, 그것은 “원칙과 실례 사이를 끝없이 왕래하는”, ‘절충적’인(즉, 연역과 귀납 사이에 위치한) 연구 방법에 크게 힘입고 있다. 원칙은 하나의 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 즉, 이데올로기는 주술적인 것..
깊은 삶 한 그루 인간의 나무로서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 짙푸른 녹음처럼 저의 욕망을 펼치는 것, 그리고 고적한 밤에 그리고 천둥칠 때 만물의 수액이 제 손 안에서 흐르는 걸 느끼는 것 ! 사는 것, 얼굴 위로 햇살들을 받는 것, 이슬비와 눈물들에서 불붙은 소금을 마시는 것, 그리고 대기 속에 인간의 수증기를 뿜어내는 기쁨과 고통을 열렬히 맛보는 것 ! 생생한 마음으로 공기와 불과 피를 느끼는 것, 대지 위의 바람처럼 맴돌이 춤을 추는 것, — 현실에서 일어서서 신비에 몸 기울이는 것. 떠오르는 아침과 저무는 어스름이 되는 것. 버찌 색을 품은 자줏빛 저녁처럼 진홍빛 심장에 불길과 물이 흐르게 하는 것. 그리고 해맑은 아침해가 언덕에 걸리듯 주저앉은 세상 가두리에서 꿈꾸는 영혼을 가지는 것. 페르시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