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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정신분석하기-마르트 로베르의 『기원들의 소설과 소설의 기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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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정신분석하기-마르트 로베르의 『기원들의 소설과 소설의 기원』

비평쟁이 괴리 2023. 11. 12. 15:48

마르트 로베르Marthe Robert는 한 손에 카프카를 다른 손에 프로이트를 들고 있었다. 그는 카프카의 작품이 얼마나 재미있는가를 프랑스인들에게 알려준 번역자였으며, 『정신분석의 혁명:프로이트의 생애와 작업』을 써서 라깡으로부터 “최고의 프로이트 전기”라는 상찬을 받은 정신분석학자였다. 『기원들의 소설과 소설의 기원Roman des origines et origines du roman』(김치수․이윤옥 역, 문학과지성사, 1999)은 저자가 손에 든 두 개의 도구를, 때로는 심벌즈처럼, 때로는 캐스터내츠처럼, 그리고 때로는 부싯돌처럼 맞부딪쳐 이루어낸 뛰어난 화음과 번뜩이는 인식의 책이다.
프로이트에서 라깡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정신분석학자들이 정신분석이론의 ‘계몽’을 위해 소설을 수단으로 활용한 것과 달리, 마르트 로베르는 정신분석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소설에 관한 아주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그는 정통 프로이트파처럼 모든 텍스트에 성충동의 원리를 대뜸 대입하지도 않았고, 라깡처럼 무의식의 복잡한 과정을 난해한 알고리즘으로 재구성하지도 않았다. 마르트 로베르는 정신분석의 기본 원리들을 이야기의 보편적 욕망의 차원으로 확대시켜 한편의 계발적이고 일관성 있는 소설의 이론을 세운다. 그가 정신분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성충동이 아니라 ‘가족소설’이다. ‘가족 소설’은 어린 아이가 쾌락에 대한 욕망과 그에 대한 현실원칙의 억압 사이에서 고통을 겪으며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날조된’ 역사를 뜻한다. 가령, 사회적 억압을 느끼는 순간부터 아이는 자신을 천국에서 추방된 신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현실의 가짜 부모에서 해방되어 천국으로 귀향하려는 시련에 스스로를 내맡긴다. 아이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그 시련의 역사가 바로 가족소설이다(대부분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였던 한국인들은 『구운몽』의 ‘양소유’를 상기하시라).
소설은 이 ‘가족소설’의 연장이자, 그에 대한 사회적 환기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회에 완벽히 적응하게 된 성인에게 가족 소설은 의식의 어두컴컴한 헛간에 파묻혀 버리고, 오직 광인만이 여전히 그 날조된 역사를 파먹으며 사는데, 소설은 그것을 교묘하게도 합법적인 방식으로 표출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소설이 사회적 금기와 한계를 뛰어넘어 영원한 자유와 절대를 갈망하는 영혼의 모험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 시련의 역사 혹은 영혼의 모험은, 그런데, 크게 두 가지 양태를 가지고 있다. 업둥이와 사생아가 그 둘이다.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은 부모의 성적 차이에 대한 인식의 여부인데, 업둥이는 부모를 한 덩어리로 인식해 현실의 가짜 부모를 벗어나 진짜 부모, 즉 ‘다른 세상’을 꿈꾸는 자를 가리키며, 사생아는 부모를 아버지와 어머니로 나누어 그 중 한 사람에게 자기의 진짜 혈통을 부여하고 거기에 근거해 현실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자를 가리킨다.
대부분의 소설은 그러나 업둥이 혹은 사생아 중 어느 한쪽의 선택이 아니라, 그 둘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며, 그 조합의 방식에 따라 아주 다양한 소설들의 유형이 탄생한다. 가장 기본적인 유형은 돈키호테와 로빈슨 크루소로서, 업둥이와 사생아가 서로 소통하여 업둥이의 꿈을 사생아의 간지(奸智)로 이루려 하면 로빈슨이 태어나고, 업둥이와 사생아가 서로 방해하여 사생아의 꿈에 업둥이의 행동 방식이 적용되면 돈키호테가 태어난다. 물론 소설의 역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업둥이로부터 사생아로, 혹은 사생아로부터 업둥이로 가는, 결코 고갈되지 않는 순환의 회로를 그린다. 소설을 움직이는 욕망은 하나이지만, 어떤 소설도 결코 똑같지 않은 것이다.
마르트 로베르는 1914년 태어났고 1996년 돌아갔다. 그는 대학에 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를 기르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몇 권의 책과 업둥이와 사생아, 돈키호테풍과 로빈슨풍 등의 소설적 개념들은 그를 소설 애호가들과 이론가들에 의해 영원히 기억될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애석하게도 그의 타계를 프랑스의 언론이 알렸을 때, 그것을 주목한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그의 이론이 역자인 김치수 교수 등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미 한국에 소개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베르의 소설론은 또 하나의 은폐된 이야기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번역에 의해 그 은폐된 이야기가 전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예전의 소개가 전채(前菜)에 해당한다면, 오늘의 번역은 주 요리가 될 것이다. 마침내 상이 차려졌으니 그것을 마음껏 드실 사람들은 물론 독자여, 당신들이다.
󰏔 1999. 6. 28, 대한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