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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중심주의를 이성적으로 극복하기 -강지수 외 『문학과 철학의 만남』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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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중심주의를 이성적으로 극복하기 -강지수 외 『문학과 철학의 만남』

비평쟁이 괴리 2023. 11. 16. 05:21

제목이 수상하다(강지수 외 『문학과 철학의 만남』, 민음사, 2000). 문학과 철학의 만남? 언제 그들이 안 만난 적이 있던가? 적어도 문학 쪽에서 보면 아니다. 50년대의 실존주의, 60년대의 한국의 이념형에 대한 탐구, 70년대의 비판 철학, 80년대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90년대의 해체 철학은 모두 문학의 마당에서 문학의 몸을 통해 표출된 것들이었다. 현대의 한국문학은 철학하기,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한 간구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뜬금없는 게 아닐까?
아니다. 어떤 불길한 징후가 이 책에 실린 글들을 뭉치게 하고 있다. 그 징후는 셋이다. 우선 문학 쪽에서. 언제부턴가 한국문학은 철학을 떠나고 있었다. 진리의 울타리를 뚫고 나가 환상의 대 열락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장경렬은 환상으로부터 상상으로의 복귀 혹은 도약이 문학의 핵심 과제임을 암시한다. 다음. 사회 쪽에서. 도구화된 철학. 다시 말해 “도구적 이성의 거의 결정적인 승리”(정명환). 오늘의 세상은 “정서적 체험을 무시하는 자들이 테크노크라시대와 뷰로크라시의 조종을 받으며 현대 사회를 비인간화시키는”(진교훈) 사회이다. 그리고, 철학 쪽에서. 도구적 이성의 반대편에 놓인 독단적 이성. 진리를 굳은 명제들로 환원시키는 철학 혹은 진리주의의 횡포가 인간의 실존을 왜곡하고 있었다.
분명. 문학과 철학은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의 공통된 입장을 요약하자면,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이성적 극복이 바로 그 만남의 의미이다.
문학 쪽에서는 이성중심주의의 극복이, 철학 쪽에서는 그 극복의 이성적 방법이 제공된다. 이 만남으로부터, 철학과 문학은 “역사적 현실을 창조적으로 조형하는 최고의 전략들”(김상환)이 공히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되는가? 대답은 다양하다. 진리의 역설(力說)이 아니라 역설(逆說)로 도달하는 진리(정명환), “개체적 생존의 정황”으로부터 근원적 삶을 향하는 것(김우창), 삶의 장벽을 몸으로 포월(包越)하기(김진석), 주관과 객관의 상호 변환(김병옥)….
대답의 내용이 어떠하든 그것들은 모두 생활세계의 한복판에서 출발해 그 절실성을 해결하는 방향에서 인식과 상상의 기획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극히 자명한 깨달음으로 독자를 이끌고 간다. 그 자명한 진리는 그러나 얼마나 실천이 어려운가?
이 책의 절실성은 바로 그 물음 위에 놓여 있다.
󰏔 2000. 3. 17,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