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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의 이데올로기를 추적하기-올리비에 르불의 『언어와 이데올로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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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의 이데올로기를 추적하기-올리비에 르불의 『언어와 이데올로기』

비평쟁이 괴리 2023. 11. 4. 19:29

목차만을 따라 읽으면 그 책의 전반적인 구도가 선명하게 머리 속에 펼쳐지는 서적이 있다. 완독하고 난 다음에는 책의 내용까지도 차곡차곡 재기억된다. 『언어와 이데올로기』(Olivier Reboul 저, 홍재성․권오룡 역, 역사비평사, 1994)는 그런 책이다. 교육 철학자의 신념이랄까, 방법론이랄까 하는 것이 완벽하게 적용된 범례이다.
이러한 명료성은 그러나 단순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관되고 세밀한 분류, 섬세한 논증, 그리고 가능한 반론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 등 잘 압축된 풍요함과 어울리고 있는데, 그것은 “원칙과 실례 사이를 끝없이 왕래하는”, ‘절충적’인(즉, 연역과 귀납 사이에 위치한) 연구 방법에 크게 힘입고 있다.
원칙은 하나의 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 즉, 이데올로기는 주술적인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가장함으로써 권력의 정당화에 봉사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원칙이 드러나는 자리는 다양한데, 저자의 시선이 착지한 자리는 ‘언어’의 층위이다. 즉 언어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의 절차와 양태에 대한 분석,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 담화에 대한 분석이 이 책의 내용을 이룬다. 왜 언어일까? 이 언어-담화는 임의로운 선택사항이라기보다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데올로기의 특권적 영역,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그 특수한 기능을 직접적으로 수행해내는 영역은 언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저자가 야콥슨과 오스틴의 언어학적 모델에 기대어서 제시하고 분류하고 논증하고 있는 다양한 언어적 절차들, 즉 이데올로기적 담화의 작용태들은 권력 정당화에 봉사하는 언어의 현혹적인 움직임들을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독자가 이 책에서 얻을 것도 그 교묘한 방법들과 실례들이다.
다만 독자는 이 책이 이데올로기적 담화의 기능성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부당 전제는 이데올로기적 담화의 중요한 절차 중의 하나를 이룬다. 저자는 이데올로기적 담화가 이 부당전제에 의존함으로써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가장하게 되는 경위를 밝힌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들이 이 부당전제를 사전에 혹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용인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언어의 울타리 밖으로 나갈 때만이 밝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서평자는 갖고 있지 못하지만, 한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담화의 작용태, 즉 기능성에 대한 편향이다.
결론의 비약은 이에 연관된 것일까? 본론을 지탱하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담화와 그렇지 않은 담화 사이의 구분이 결론에서는 바람직한 이데올로기와 그렇지 못한 이데올로기의 구분으로, 즉 구조적 차이가 정도의 차이로 대치되어 있다. 심지어, 애초의 기본 원칙이 무시되고 있기조차 하다. 권력의 정당화에 봉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가령, 반인종차별주의)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비약은 모든 이론적․문화적 작업에 이데올로기의 혐의를 씌우는 무정부주의적 함정을 피해야겠다는 무의식적 욕구의 발로일까? 아니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이데올로기의 불가피성이라는 양자택일의 함정에 빠진 저자의 궁여지책일까? 그렇다면 이 책은 이데올로기적인가, 아닌가? 이데올로기의 기능에 대한 가장 명쾌한 해설의 하나로 꼽힐 만한 이 책에 대해 이 물음을 제기한다는 것은 흥미롭고도 착잡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명쾌함을 창출해낸 또 하나의 원천은 번역자에게 있다는 지적이 필요하리라. 역자들의 해박한 지식과 꼼꼼한 주의는 정확한 역어와 유려한 문장, 그리고 긴요한 역주에 두루 적용되었으며, 독자를 번역서를 읽을 때의 불안과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있다. 
󰏔 1994. 9. 20, 출판저널, 권력에 봉사하는 담화의 이념적 층위,  연역과 귀납의 절충적 연구 방법 인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