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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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비평쟁이 괴리 2023. 10. 1. 10:46

※  1996년에 씌어졌고, 2006년 문신공방 1』에 수록되었던 이 글을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기가 막히고 침통한 일이다.

한국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물음을 던지는 것조차 겸연쩍을 정도로 한국문학은 이상궤도를 비행하고 있다. 분명 외형적으로 한국문학은 괄목상대하게 팽창하였다. 경제 침체가 다급한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킨 올해에도 소설 공장들은 바쁘게 돌아간다. 문학 출판물 광고가 일간지에까지, 심지어 TV에까지 침범하는 특이한 한국적 현상도 예년과 다를 바 없이 왕성하다.
그러나, 서점에 나가 보라. 문학 코너에 주단처럼 드리워져 있는 온갖 화려한 서적들은 스릴러, 무협소설, 낙서시, 괴기물, 싸구려 교양물들, 요컨대 문학의 본래적 기능이라고 간주되는 반성적 힘 대신에 한때의 무료를 달래고 충동을 소진시키는 위락적이고 소모적인 기능으로 번쩍거리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한국문학은 두 개의 극단으로 찢겨져 있다. 욕망의 하수구로 변해버린 문학상품들의 범람과 문학성의 급격한 퇴조. 근대 이후 줄곧 정치적 억압과 긴장상태에 놓이며 그것과 싸우는 데서 상상적 진실의 힘을 일구어온 한국문학은 돌연 변화한 세상을 틈 타 침략한 문화산업의 무차별 공세에 지리멸렬한 괘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우울한 현상에 대해 무조건 문화산업이라는 음험한 그늘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이 배후의 힘이 측량 불가능한 세기를 갖는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문학의 무기력을 미만시키는 것은 문학 자신의 몫이다. 더욱이 그 무기력한 문학의 정작 겉모습은 예기치 않은 유산을 상속받은 노처녀의 사치를 방불케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무엇이 문학의 문제인가? 우선, 싸울 대상이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문학은 그것을 낌새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문학의 적은 더 이상 정치권력이 아니라, 문화적 욕망들이라는 것. 그것들은 이념의 몰락(90년 초)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도래(88년 이후)가 포개지면서 파놓은 사유의 공백 속을 슬그머니 비집고 들어와 광범위하게 우리 삶을 잠식하였다. 그러나, 문학인들은 여전히 낡은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고, 문화 산업을 다정한 벗으로 착각하였다. 다음, 문학인들은 문화산업과 활발히 공모하게 되었다. 착각 속에 빠진 문학의 눈으로 볼 때 문화산업은 부를 가져다줄 좋은 후원자였다. 문학은 하나 둘 문화산업과 계약을 맺기 시작했고, 그러자 문화산업이 요구하는 상품을 자발적으로 만들게 되었다. 한국인의 우월성을 자극하는 정치소설과 역사물들, 삶의 문제를 모호한 분위기로 카므플라쥬하는 여성주의 문학이 창궐하게 된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다. 한때 정치소설과 역사물들은 한국인의 뿌리를 세우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한때 여성주의 문학은 욕망 분출의 세계가 초래할 섬뜩한 재앙에 대한 불길한 징후로서 기능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것들은 한국사를 신비화시키고, 세상의 고뇌를 개인적 감상으로 무력화시키는 데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평의 도피. 지금의 침체야말로 비평에게는 그동안 정치적 싸움을 하느라고 방치해 둔 한국문학의 현대사의 골격을 제대로 복원할 호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비평은 갈피를 못잡은 채로 표류하고 있는 중이다. 비평은 문학상품의 광고문구로 점점 전락하고 있고, 비평가들은 곳곳에 개장한 문화 공원들로 원족나가는 걸로 생을 즐기고 있다. 독한 항의와 부정의 목소리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외침에 귀기울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문화산업의 거미줄 속에 연루되어 있는 지금, 그 거미줄을 갈아치울 자는 거미줄 속의 거미들뿐이다. 누가 떼거미이기를 포기하고 염낭거미가 되려 할지, 무엇이 그 변신을 약속할지 분명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물음이 나올 데는 그 안 말고는 없다.
󰏔 1996. 12. 24, 사람과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