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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의 문화적 위상

비평쟁이 괴리 2023. 9. 8. 03:04

어느 시인이 그 마을의 주소는 햇빛 속이다라고 썼던 것을 떠올리며, 나는 신춘문예의 주소는 문화제도 속이다라고 쓴다. 그것은 문화제도 속에서 살아 숨쉰다. 그것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그러하다.

긍정적이라는 것은 문화제도의 중심으로의 구심적 운동을 그것이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쓰인 것이다. 외재적으로 신춘문예는, 문단이라는 공식 기구에 편입되려는 욕망을 겹으로 두르고 움직인다. 내재적으로 그것은, 문화제도가 문화의 본질을 미리 전제하고 그것에 맞추어지기를 요구하듯이, 문학적 본질을 상정한다. 작품 자체이건, 심사평이건, 당선 소감이건, 신춘문예를 둘러싼 언술행위들은 문학적 본질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주장하는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심사평은 작품에 씌어진 언어들의 의미를 묻기보다는 그것들이 적절하게 배열되어 있는가 어떤가, 합당한 주제를 표현하고 있는가 어떤가 하는 요소들의 기능을 검사한다. 의미를 묻지 않는다는 것은 본질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본질이 있으면 의미는 저절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당선소감들은 빈번히 문학이라는 절대 존재에 대한 갈구와 절망을 고백한다. 작품들은 조형의 완벽성을 향해 나아간다. 군더더기를 없애 버리면서, 그것들은 문-이데아의 순수 결정체를 빚어내려 한다. 균형을 파괴하는 작품은 신춘문예에 적당하지 않다.

문학에 본질이 있다는 믿음, 우리는 그것을 문화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그 형이상학은 보이지 않는 이데아를 정점으로 하여, 모든 문화적 사실들을 그 이데아의 하위 반영물의 이름으로 밑에 배치하는 위계질서를 구성한다. 여러(굳이 단서를 달자면 닫힌), 문화제도들은 그러한 형이상학을 양분으로 자란다. 그것들은 복잡하게 분화되고 성층화된 집단의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데, 그러나 본질이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들 사이에는 자신의 체계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싸움이 벌어진다.

그 싸움은 때로는 적대적 충돌로, 때로는 타협으로, 때로는 연합으로 나타나는데, 그 충돌타협연합을 움직이는 원리는 은폐와 과장과 흡수의 전략이다. 그것들은 자신의 체계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고, 주장하며, 그 주장을 자신의 특정 부분을 과장함으로써, 그리고 타제도의 특정 부분을 흡수함으로써 실천한다.

신춘문예는 그 문화제도들 간의 싸움에서 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묘하다는 것은 그것이 제도의 원시성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것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응모자의 익명성은, 심사자나 응모자로 하여금, 미리 누구의 편을 들 수 없게 만든다. 그들은 서로를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으며 알아서도 안 되지만, 둘이 함께 공통의 문학적 본질의 바탕 위에 놓여 있다는 전제 하에, 심사와 응모에 참여한다. 그런 뜻에서 신춘문예의 인식구조는 세계는 하나이다라는 일원성의 그것이며, 동시에 그 하나의 본질을 주장과 강요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추구와 선택의 문제로 제기한다.

그 때문에 그것은 다른 형이상학적 문화제도들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다른 것들이 자의적으로 상정한 이데아를 밑으로 퍼뜨리는 데 비해, 그것은 거꾸로 그 이데아를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제도의 자의성에서 필연성을 찾아내려는 모험을 낳는다. 그것은 제도가 최초로 수립되는 순간의 이상 혹은 환상에 밑받침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허약하다. 세계가 하나라는 것, 즉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관적 문화제도들 간의 싸움 앞에서 무기력하며, 그것들에 흡수될 운명에 종종 처한다. 이를테면 신춘문예 당선자에게 주어지는 권위는 그 자체로서 존립한다기보다는 한 문학 집단 내에서 그 당선자를 돋보이게 하는 기능적 장치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등단의 절차가 다양한 정황 속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신춘문예의 객관성에의 환상은 환상 그 자체로서 다른 문화제도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것은 자의적 문화제도들에 흡수되는 그 순간에 그 제도들의 주관성과 마찰을 일으키고, 그것에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여지를 남긴다. 그러면서 그 문화제도들의 주장, 즉 자신의 체계가 보편적이라는 주장이 실은 하나의 알리바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폭로한다. 그때 신춘문예는 문화제도들의 경직화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하나의 문화체계에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은, 그것이 당대의 문화적 정황에 어떻게 의미작용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바뀌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신춘문예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문화제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생산한다. 현재 그것의 의미는 양가적이다. 그 양가성은 신춘문예라는 화려한 행사의 뒷면에 위태로운 흔들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흔들림이 소멸을 낳지는 않는다. 그 흔들림 때문에 그것은 존속한다. 그것은 앞으로도 한동안은 해마다 수많은 문학도들을 들뜨게 하고 애태울 것이다.

󰏔 1988. 1. 12,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