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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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공방/문신공방 하나

노벨상 비감

비평쟁이 괴리 2023. 10. 4. 00:14

※ 노벨상 소식이 들려오는 계절이 왔다. 문신공방 하나』(2006)를 이 블로그에 올리는 일을 시간 날 때마다 해오고 있는데, 하필이면 시의적인 글을 등록한다. 이 글은 1998년에 씌어진 것이다. 다시 읽어 보니, 여전히 유효하다. 며칠 전에 고백한 침통한 마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10월이면 어김없이 인구에 회자되는 것 중의 하나가 노벨상이다. 이 얘기는 타령조를 동반하곤 하는데 그렇기도 할 것이 한국은 한 번도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노벨상 타령에는 묘하게 정형화된 틀이 있어 보인다. 우선, 여기에는 단순히 한국인의 긍지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 이상으로 인접국가들에 대한 경쟁의식이 숨어 있다. 요컨대 중국도 받았고 일본도 받았는데 한국은 왜 못 받는가, 라는 투정이 배어 있는 것이다. 원래 노벨상은 국가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상은 국가 규모로 움직인다. 마치, 박찬호나 박세리가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 한국인 모두의 어깨가 으쓱거리듯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축구도, 야구도, 골프도 중국이나 일본보다 못할 게 없는데, 노벨만은 이웃나라에서만 종소리가 나는 것이다. 노벨은 한국의 취약 종목이 되어 있는 셈이고, 그게 골프로 빳빳이 섰던 목을 여지없이 본래의 축 처진 모양으로 되돌려 놓고 마니, 짜증이 나고 한숨이 나올 만하다.
다음, 한국인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노벨문학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과학 부문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한국 학문이 열등생임을 자인하고 있는 듯하고, 평화상에 대해서는 그것이 순수한 정신적 성취에 대해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타협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받았다고 자존심 구기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에 비해, 문학상은 유수한 문화 선진국들과 충분히 겨루어볼 만하다고 사람들은(무엇보다도 한국 언론과 정부 기관과 문화 단체들은) 생각없이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한번 따져 볼만한 일이다.
먼저, 노벨문학상이 대중적 화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문학적 평가의 지표는 아니라는 걸 지적하기로 하자. 올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는 노벨상 근처에도 못 가보았고, 역시 금세기 최고의 작가로서 프랑스가 선정했던 프루스트도 마찬가지다. 또 조이스와 같은 고향 출신의 사뮤엘 베케트는 오불관언하다가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는 조건으로’ 마지못해 수락하였으며, 사르트르는 아예 거부를 했다가 말년에 상금만 받았다. 또 콜롬비아의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상을 받긴 하였으나, “북쪽 나라에서 남쪽 나라 사람에게 상을 주다니 놀랄만한 일”이라고 은근히 빈정대었고, 작년에 수상한 이탈리아의 다리오 포는 수상 소식을 듣는 순간 첫 마디가 “돌았군”이었다. 그러니, 정작 상당수의 뛰어난 작가들은 이 상을 문학적 영예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며, 실제로 스웨덴 한림원의 주관적 편견과 정치적 고려가 수상작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벨상을 아예 무시하자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것이 대중의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앞에서 말한대로 그 가치는 그것의 수상이 국가적 명예를 높이는 일이라는 데에 있다. 실로, 스웨덴 한림원의 수상자 결정은 사실상 나라를 잣대로 해서 돌아간다. 특히 문학의 경우는 더 그러한데, 왜냐하면, 과학과는 달리 문학은 절대적인 객관적 기준이란 게 없고, 설혹 평가를 한다 하더라도, 문학이란 민족어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각 민족별로 하는 게 제일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스웨덴 한림원에서 작년엔 이탈리아였으니까, 올해는 포르투갈, 내년엔 남미, 내후년엔 아프리카… 식으로 나누어주기를 관행처럼 할 수밖에 없는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노벨상이 국가의 문화적 위신을 높여준다면, 노벨상을 받는 게 안 받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다. 그리고 받을 필요가 있다면, 그것이 작가의 문학적 성취와 관련되기보다는 국가의 위신과 관련된 일이니까, 그것을 위해 노력을 할 쪽도 국가 쪽이다. 실로 문제는 여기에 있다. 스웨덴 한림원에 로비를 한다고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한국에 노벨상이 돌아오려면 외국인들이 한국문학을 알아야 하며, 더 나아가, 한국문학을 낳은 한국의 독특한 문화․역사적 전통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을 자세히 소개하는 자료들이 지구촌 곳곳에 널리 그리고 많이 퍼져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예로, 외국의 큰 서점의 동양 코너에 나가보라. 일본과 중국에 관한 서적은 분야 별로 빼곡히 차 있는데, 한국에 관한 서적은 그저 관광 안내용의 얄팍하고 부실한 책들이 그저 몇 권 꽂혀 있을 뿐이다(김윤식 교수의 97년 방문기에 따르면, 노벨 재단 도서관에 있는 한국문학 책은 스웨덴어로 번역된 게 겨우 4권, 그리고 불역된 게 30여 권 정도 있을 뿐이다).
도대체 어째 이런가, 하고 교포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답인 즉슨, 한국의 대사관 직원들은 ‘의전’ 때문에 나라 홍보를 하고 다닐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의전이라니? 바로 본국에서 오신 고위 관료 손님들을 모시는 일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시는 일 속에는 직무상의 수행 및 지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쇼핑을 하거나, 관광을 가거나 등등의 자질구레한 개인사까지 다 포함되어 있는 데다가, 갖가지 연줄을 통해 정중히 모셔야 할 분들이, 과장해서, 시시각각으로 해일처럼 몰려오니,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고, 시간을 몇 배로 쪼개도 모자랄 판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문제 해결을 떠맡고 나서야 할 쪽에서 오히려 훼방을 놓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뿌리깊은 고질은 뒷전에 둔 채, “노벨문학상 예비후보선정 위원회를 설립”해(이는 작년 대선 때 세 후보가 똑같이 공약한 내용이다) 이상한 운동을 펼칠 궁리를 하거나, 한국문학 번역 지원 사업을 국내에 벌여놓은 것으로 만사가 다 해결된 것처럼 한가로이 생각한다면, 한국작가와 노벨상과의 만남은 아마도 백년하청일 것이다.
노벨상을 두고 너무 요란하게 떠드는 것도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지만, 기왕 떠들 양이면 제대로 떠들고 제대로 행동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 우울에 독감이 든다. 썩 우울하다.
󰏔 1998. 1, 조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