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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아래 글은 '동인문학상' 제 55회 두번째 독회에 대한 결과로서의 독회평이다. 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 올린다.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11)은 현재 가족의 사건으로 인해 야기된 정신적 질환을 ‘일기 쓰기’를 통해서 치유하는 한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분노의 감정이 밤송이처럼 껍질을 뚫고 솟아나는 현재의 사건은 금세 뒤로 숨고, ‘일기’의 형식으로 인물의 지난 세월을 차분히 회상하는 과정이 매우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그 솔직함으로 이 소설은 198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사람들의 사회적 환경과 정신적 정향을 추적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 충분히 쓰일만하다. 이 소설은 문학의 기능에 관한 진지한 질문을 제기한다. “..
※ 아래 글은 제55회 동인문학상(2024)의 첫 번째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의 홈페이지에서 1차 독회의 결과에 대한 이영관 기자의 요약기사( 유머는 있으나 웃을 수가 없고 순간은 사라졌으나 잔상이 남네 (chosun.com))와 심사위원 전체 의견 전문( [동인문학상] 1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chosun.com)) 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올린다. 프랑스의 정신의학자이자 작가인 프랑수아 를로르François Lelord는 『엑토르는 새 인생을 살려고 한다』(Odile Jacob, 2014)라는 소설에서 정신과 의사인 주인공의 입을 빌려, 세상 사람들을 두 종류로 분류하고 있는데, ‘감염병’으로 존재하는 자와 ‘감염되는 자’가 그 둘이다. ..
※ 아래 글은 제55회 동인문학상(2024)의 첫 번째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의 홈페이지에서 1차 독회의 결과에 대한 이영관 기자의 요약기사( 유머는 있으나 웃을 수가 없고 순간은 사라졌으나 잔상이 남네 (chosun.com))와 심사위원 전체 의견 전문( [동인문학상] 1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chosun.com)) 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올린다. 아주 오래전 청소년을 위한 철학동화로 베스트셀러가 된 『소피의 세계』에서 저자 요슈타인 가아더는 ‘대위법’이라는 장에 “두 가지 이상의 멜로디가 동시에 울려 퍼진다”라고 쓴 적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대위법의 핵심을 짚었다는 점에서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점은 대위법에서는 둘 이..
무제 인간의 삶에는 보상이 없다. 사는 것보다 더 하거나 덜 한 대가란 없다. 식물이든, 광물이든, 동물이든 빛나고 울고, 울부짖고 흐느끼는 그 모든 것. 코끼리의 찢는 소리 암소의 음메 소리 당나귀의 칭얼 소리, 뱀의 쉬익식 쉬익식. 울어봤자 소용없어, 그 소리 요란해도 한 사람을 죽음에서 꺼내지 못하네. 죽음은 의기양양. 웃음짓네. 오만히 흡족하여 이리 말하네. « 죽은 자들의 등 뼈 위에 너희의 쟁기를 얹거라. » L'existence humaine est sans prix sans plus ni moins de prix que tout ce qui existe végétal, minéral, animal tout ce qui brille, hurle, brame, gémi barrissement ..
첫 잎사귀 너희들 내게 내미누나, 나무의 푸른 작은 손들을. 길가 나무의 푸른 작은 손들을. 낡은 벽돌담들은 군데군데 허물어져서 고가들의 퇴락을 드러내고 있는데. 너희들은 내게 내미는구나. 생울타리의 새싹들을. 작고 푸른 손가락들을. 어리고, 반짝이며, 맹렬히 생을 탐하는 조개모양 접힌 손가락들을. 낡은 벽돌담 너머로 너희들은 우리에게 몸을 내미는구나. 늙은 벽돌담은 말하네 : « 광풍을 조심하거라, 작렬하는 햇볕을, 번득이는 밤들을 조심하거라. 염소를, 송충이를 조심하거라 산다는 걸 조심하거라, 오 작은 손가락들아 ! » 푸른 작은 손가락들아, 발톱을 가졌지, 다정하지만 퉁명스러울 줄도 알지. 너희들은 오늘 아침 왜 늙은 벽돌담이 카상드르 [2]의 목소리를 내는지 잘 알고 있지. 보송송한 비단을 두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