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비-인간의 나락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어떤 두레박을 마련할 것인가? - 박지영의 『이달의 이웃비』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비-인간의 나락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어떤 두레박을 마련할 것인가? - 박지영의 『이달의 이웃비』

비평쟁이 괴리 2024. 1. 31. 09:48

※ 아래 글은 제55회 동인문학상(2024)의 첫 번째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의 홈페이지에서 1차 독회의 결과에 대한 이영관 기자의 요약기사( 유머는 있으나 웃을 수가 없고 순간은 사라졌으나 잔상이 남네 (chosun.com))와 심사위원 전체 의견 전문( [동인문학상] 1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chosun.com)) 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올린다.

프랑스의 정신의학자이자 작가인 프랑수아 를로르François Lelord는 『엑토르는 새 인생을 살려고 한다』(Odile Jacob, 2014)라는 소설에서 정신과 의사인 주인공의 입을 빌려, 세상 사람들을 두 종류로 분류하고 있는데, ‘감염병’으로 존재하는 자와 ‘감염되는 자’가 그 둘이다. ‘감염병’은 부호, 정치가 등 사회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있는 사람들이고, 감염당하는 자들은 ‘감염병’에게 장악당한 보통 서민들을 가리킨다.
이런 분류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없지만, 지도자급 인사들이 보통 사람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를 새삼 떠올리게 하는 한편, 그 영향가들을 ‘감염병’ 그 자체로 지시함으로써 상위 계급의 무분별함과 해악성을 노골적으로 풍자한다는 점이 눈에 띤다고 할 수 있다.
뜬금없이 낯선 외국 소설을 들먹인 것은 박지영의 『이달의 이웃비』(민음사, 2023.09)가 바로 이 소설의 반사광에 해당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박지영 소설집의 거의 모든 인물들은 영향력이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를 바가 없는 자들’(수년전에 ‘비체[非體; l’abject]’라고 종종 지칭된)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들의 생물적 존재성은 너무나 뚜렷해서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증명하려는 활동을 왕성히 분출하는데, 그 양상은 놀랍게도 프랑스 작가가 ‘감염병’이라고 지칭한 존재들의 활동을 고스란히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감염되는 자의 존재상을 가지고 ‘감염병’이 되기 위해서 아득바득 용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양상이 도출되기 전의 사전적 상황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즉 박지영의 소설 사건들은 기본적으로 ‘바탕 이야기’와 ‘표면 이야기’라는 두 겹의 이야기 더미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탕 이야기’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서만, ‘표면 이야기’의 의미가 온전히 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탕 이야기’에서는 앞에서 ‘비체’로 지칭한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순수한 ‘비체’이다. 문헌을 뒤져보면, 이런 ‘비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micropsuchia 혹은 스피노자의 l’abjectio의 상황에 빠진 존재들, 즉 “부당하게 형편없는 삶 속에 빠진 존재들”로서 인간으로서의 긍지와 존엄을 박탈당한 존재들이다. 실례로 들자면, 정신박약아나 정신질환자, 무위도식자, 치매 노인 등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도스트옙스키적인 ‘비참한 사람들’과 다른데, 그것은 후자가 인간 이하로 추락해 있다는 자신의 존재 상태를 깨닫고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데 비해, 비체들은 그 상황 속에 침닉해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이상, 앙드레 꽁트-스퐁빌 André Comte-Sponville, 『철학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13, p.118, ‘bassesse’ 항목 참조)
또 하나의 부류가 있다. 그들은 이 ‘무의미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이다. 간병인, 직장을 그만 둔 가족 등이다. 주로 주인공 혹은 화자 역할에 배당된 인물들로서, 그들은 상태적으로 비체들에 비해서 상위에 있다. 그 점에서 그들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일 것 같지만 그러나 아니다. 사회의 이상적 교범에 의하면, 그들은 영향력 있는 사회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낮은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돌봄은 생산적인 돌봄이 아니라 소모적인 돌봄이며, 따라서 그들의 돌봄은 ‘비체들’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데에 기능적으로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삶 역시 무의미하긴 마찬가지다.
이 두 부류는 돌봄/의존과 인내/반발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관계의 양상을 끊임없이 변이시키면서도 그 형식은 동일하게 반복하는 데서 겨우 생의 박동을 느끼니, 그 박동 자체가 한없는 지루함의 터널을 판다. 
이상이 ‘바탕 이야기’를 구성하는 문제들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작성한 소설들은 예전에도 빈번히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박지영의 독자성은 이 바탕 이야기 위에 새로운 ‘표면 이야기’를 구축함으로써, 바탕의 상황을 넘어서려는 지평을 열어보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 그 노력은 바로 화자 혹은 주인공을 구성하는 ‘무의미한 돌봄’의 상황에 놓인 존재들이다. 이들이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는 건, 도스트옙스키적 ‘비참한 사람들’처럼 이 상황에 대한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표면 이야기는 하나의 목표 하에 두 방향의 계획을 꾸민다. 목표는 모든 인물들을 ‘인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 첫 번째 계획은 인물들 사이에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시민 사회의 제 1원리는 ‘천부인권’을 ‘사회계약’으로 지탱하는 것. 즉 인물들 사이에 계약관계를 수립하는 게 인간의 지위를 회복하는 첩경이 된다. 그래서 화자 혹은 주인공은 현재의 ‘돌봄/의존’ 관계를 ‘거래’ 관계로 변환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다다. 그러나 돌봄을 받는 자는 거래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 그 대신 돌봄을 받는 자 역시 법적으로는 일반 시민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장해 줄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직계 가족이거나 아니면 시청이나 정부 등 공공기구거나. 그들과 거래 관계를 맺으면 관념적 차원에서 두 비체적 존재들이 두루 지위를 회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질적으로 가능한가? 누구나 잘 알다시피 영향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스스로의 이득을 극대화하는데 써먹을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문학에서도 이미 김유정의 「봄봄」에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듯, “애최 계약이 잘못된” 사정을 빈번히 표출해 왔던 것이다. 
이로부터 두 번째 계획이 발생한다. 돌봄을 받는 자의 가정된 지위와 실질적 지위의 차이를 이용하여 이들의 실종이 오히려 존재를 인정받게 되는 상황 속에 돌봄을 받는 자 스스로를 해결사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종종 모바일에서 문자로 받는 공공기관의 메시지, “A시에서 실종된 xx세의 아무개를 찾습니다”에 무위도식하는 누군가와 계약을 맺어, 실종된 사람을 찾는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때 계약은 인터넷에 올린 일종의 쓸모없는 내용을 담은 거래이고, 그런 터무니 없는 거래에 문제를 앓는 ‘비체’들이 응답할 것이라고 가정된다. 
두 번째 계획을 풀 버전으로 풀어내고 있는 게 표제작인 「이달의 이웃비」이다. 지적 장애인으로 태어나 죽은 형과 그를 돌본 ‘동석’의 사연이 ‘바탕 이야기’를 이루고, 인터넷을 통해 만난 ‘병식’과의 사건이 ‘표면 이야기’를 이룬다. ‘동석’은 형을 돌보는 일에서의 실패를 딛고 병식과의 일을 통해 이들을 당당한 사회 시민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것에 대한 각성을 주는 문화적 아이콘은 ‘무한도전’이다. 
그렇다면 병식은 실종 치매 노인을 찾아주는 일을 통해 시민으로서 발돋음했던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런 시도가 처참한 실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폭로한다. 
작품 안에서 그 실패는 논리적으로 구축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시도는 영향을 주는 계급의 행태를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것, 즉 감염병에 그냥 발병으로서 감염된 게 아니라, 감염병의 방식 자체가 감염되어 발작을 일으키고야 마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노인에게 성폭행을 가하는 행동은 기계적 감염의 감염도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형상적으로 보여준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 소설(들)은 인간의 지위에서 밀려난 존재들이 인간의 울타리 안으로 진입하려는 노력의 운명적인 실패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인간(주의) 사회에 도사린 무서운 악마성을 폭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 인간들은 자신에게 내장된 그 악마성과 그것의 감염 효과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집은 생생한 드라마를 통해 절감케 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의 또 하나의 원인이 있으며, 그것은 작품의 논리가 보장하지 않고 오히려 내적 균열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병식’과의 거래를 통해 병식을 북돋고자 하는 ‘동석’의 행동이 그 스스로의 계획에 의해 바깥의 조정자로 머물고 있는 사정을 가리킨다. 즉 동석은 자신의 계획을 통해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감염병’이 되고 만 것이다. 
작가가 이 문제를 모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문학적 투신이 얼마나 성심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성은 작품 속에서 오로지 ‘사변’을 통해서만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그런 반성이 사건으로 현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소설(들)은 아직 미완 상태이다. ‘동석’ 자신이 그 말을 하고 있듯이 이 소설(들)은 더 쓰여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