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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법 세계상(世界像)이 제공하는 발견과 괴로움- 서이제의 『낮은 해상도로부터』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대위법 세계상(世界像)이 제공하는 발견과 괴로움- 서이제의 『낮은 해상도로부터』

비평쟁이 괴리 2024. 1. 31. 09:44

※ 아래 글은 제55회 동인문학상(2024)의 첫 번째 독회의 심사의견으로 제출된 것이다. 조선일보의 홈페이지에서 1차 독회의 결과에 대한 이영관 기자의 요약기사( 유머는 있으나 웃을 수가 없고 순간은 사라졌으나 잔상이 남네 (chosun.com))와 심사위원 전체 의견 전문( [동인문학상] 1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chosun.com)) 을 읽을 수 있다. 신문사의 양해를 얻어 블로그에도 올린다.

아주 오래전 청소년을 위한 철학동화로 베스트셀러가 된 『소피의 세계』에서 저자 요슈타인 가아더는 ‘대위법’이라는 장에 “두 가지 이상의 멜로디가 동시에 울려 퍼진다”라고 쓴 적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대위법의 핵심을 짚었다는 점에서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점은 대위법에서는 둘 이상 세계의 길항을 통해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연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대위법은 음악의 근본적인 수직성(화성법)을 수평성으로 변환한다. 이 변환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겠지만, 오늘의 문학작품에 관해서는 이 수평성이 대위하는 세계들 각각에게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위계관계를 거부한다는 것이리라.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서이제의 소설집, 『낮은 해상도로부터』(문학동네, 2023.08)는 ‘대위법’적 세계의 선명한 풍경을 제공한다. 모든 문학은 잠재적으로 현실과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 대위법적이지 않은 게 없을 터이지만 거기에는 대체로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반면 서이제의 소설들은 허구와 실제를 한꺼번에 허구의 장(場) 안으로 끌어들여 두 개의 상상세계로 만들고 드잡이질을 시킨다. 바로 거기에 서이제 소설의 일차적 특징이 있다. 
이에 더하는 또하나의 특징은 이 대위법이 세 개의 세계 사이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소설을 ‘자아의 세계의 대결’로 보았던 고전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소설에서 길항하는 세계는 ‘일반 세계’와 ‘개인 세계’ 둘을 가리켜왔다. 서이제 소설은 구분이 다르다. 여기에 개인/집단의 구분은 없다. 대신 ‘즉물적 현실’ / ‘상징세계’ / ‘가상세계’가 서로 길항하며, 이는 이 소설집 전 작품들에 한결같은 바탕 구조로 놓여 있다.
‘즉물적 현실’은 생존을 향해 꼬무락거리는 보통 생명들의 현실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통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보통 생명들’이라고 한 것은, 세계 관계가 특정 실체들에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호참조적인 데서 기인한다. 즉 우리가 흔히 겪는 일반 세계가 서민 세상과 지배적 위치에 놓인 경영자들의 세상과의 대립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할 때 ‘즉물적 현실’은 서민 세상을 가리키지만, 구제역으로 돼지가 살처분되는 상황에서 즉물적 현실은 날벼락 맞은 돼지들의 그것을 가리킨다. 
다음 ‘상징 세계’(부르디외적 의미로 명명된)는 즉물적 현실을 관할하는 규정적 현실이다. 이 현실을 구성하는 기본 성분은 법(그리고 그것의 집행)과 이데올로기(그리고 그것의 드리움)이다. 상징 세계는 즉물적 현실을 지배하고 관할하며, 나누고 견인한다. 이의 관리체계에서 탈락하는 즉물적 현실은 소거의 운명을 맞는다.
서이제 소설의 대위법적 특성은 이 두 세계 사이의 지배/피지배적 성질을 일차적으로 차단하고 각각의 세계를 자율성의 울타리로 보호하여, 그 각각에서 일어나는 생생한 실존 양상들을 표출한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즉물적 현실은 상징세계에 의해 견인되거나 박탈되는 경향이 지연되는 시간을 얻어, 두 세계 사이의 관계의 부당성이나 상징세계의 억압성을 깨닫고 분석하는 작업을 할 수 있게 되며, 다른 한편 즉물적 현실 자체의 생존력 혹은 역동성을 찾거나 쌓는 일을 하게 된다.
문제는 이 지연된 시간은 임의적이고 잠정적이라는 것, 실제로 두 세계 사이의 상호 침투는 추호의 여지도 없이 긴박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전선에 날아든 까치떼를 보고서 멍때리고 있을 때, 까치는 이미 정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각 세계의 자율적 작동과 상호간 길항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이 두 작동이 한꺼번에 긴밀하게 포착되고 표현되지 못하면, 독서를 지루하게 만드는 자질구레한 세목들의 나열이 되거나 아니면 지적 사변(思辨)으로 흘러감으로서 이 역시 체감의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세 번째 ‘가상세계’는 이런 궁지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가상 세계는 현재의 두 세계의 대립의 후속으로서의 미래 세계가 감당한다. 가정적으로 미래 세계는 앞 두 세계의 길항의 결과를 측량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고립된 자율성이 작동하고 있다. 실제로 가상 세계는 저의 존재 양상을 보여줄 뿐, 자신의 예정된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상세계는 두 세계의 얽힘 관계를 환상적으로 뒤집는 현상을 연출한다. 그럼으로써 앞 두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 세계’(혹은 인류세)의 악마성을 폭로하는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다. 그 스스로의 구조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은 채로. 
이런 경과를 통해 세 세계 사이에는 인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상호작용이 없는 세 수평적 세계들은 서로간의 결속력을 상실할 때 자유낙하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중력의 작용이고, 중력이 아무리 약한 힘이라도 그 결과는 파국이다. 서이제의 소설은 그 광경을 속수무책으로 송신한다. 이건 정직성인가? 무기력인가?
그러나 중력의 원천은 어디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세 세계를 모두 굴리는 ‘부처님 손바닥’을 가정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면 세 세계 사이에는 가상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증강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광경이 표현되어야 한다. 이 역시 새로운 탐구의 영역이다.
이 탐구에 대한 해결법이 단박에 어느 하늘에서 떨어질 수는 없다. 세 세계의 관계가 형성하는 네트웍의 어느 균열지점으로부터 질문이 피어나고 이 질문 자체가 삶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그 점에서 본다면 마지막 작품 「두개골의 안과 밖」은 사변(思辨) 자체를 생체험으로 변환시키고 하는 뜨거운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