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심사평, 추천사 등 (77)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COVID-19 사태로 인한 장기간의 격리 상황이 문학 창작에도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일까? 예년에 비해 단순한 감상을 털어놓는 시들이 부쩍 줄어든 반면, 논리적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경향이 크게 늘었다. 이러한 경향은, 사적 경험을 그대로 시의 지면으로 끌어오는 최근의 일반적인 추세와 맞물려, 자신의 경험을 세세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을 성큼 신장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시가 되기까지에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관건은 두 개. 하나는 개인적인 사건에서 독자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그 사건이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보편적인 문제로 치환되어야 한다는 것. 이 점이 부족하면 쓰다만 시가 되고 만다. 다른 하나는 이야기가 시의 중요한 바탕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시의 표면에서는 감각들이 반짝여야 한다는 ..
김영산 시인이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시의 관념들을 통째로 쇄신하겠다는 의지를 분출한지 오래되었다. 그가 개척한 ‘우주문학’에는 죽음과 신생의 화염이 격렬하게 불타오른다. 『백비』는 결코 이해받지 못할 이 모험의 운명에 대해 미리 쓰는 조사(弔詞)일까?. 아니다. 이는 그의 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 만나게 될 백지장 미래를 슬퍼하는 노래다. 그러나 이는 저주가 아니다. 도발이고 격려다. 새로운 시를 읽고 느끼는 것은 삶의 혁명으로 직결되기에. - 김영산 시선집 『백비』(문학연대, 2022.10), 표4
완벽한 생애를 이루는 작은 사람들의 협심 -조해진의 『완벽한 생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완전한 인간에 대한 소망이 봄바람처럼 일렁인다. 그 소망은 ‘칼로카가디아’ 등의 고전적인 용어로뿐만 아니라 ‘완전체’같은 청년들의 유행어에도 배어 있다. 인간의 내장에 각인된 본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소망을 퇴색시킨다. 문명이 발달하고 거대해질수록 인간은 점점 왜소해진다. 어느날 그는 수레바퀴 자국에 깔린 붕어처럼 납작해진 자신을 보고 절망한다.. 조해진의 『완벽한 생애』는 말한다: “모든 삶은 흘러갔다”; 이제 “낙원이 있다고 믿는 희망은 기만적”이다. 그러나 희망을 단념할 때 비로소 진정한 결심이 선다. 작가는 가난, 정치적 자유, 사내 왕따, 동성애, NGO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기웃거리게..
응모작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시로서 평가받으려면 일반의지의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도약을 위해 몇 가지 조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솔직한 감정이라고 생각한 게 꼭 솔직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현의 장르인 소설과 달리 시가 자기 심사의 표현이라는 널리 알려져 있는 정의에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깊은 응시와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항목이 숨어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둘째 대상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대상과의 심리적 상호작용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똑같은 묘사이지만 소설의 묘사는 개진적이며, 시의 묘사는 통찰적이다. 즉 대상의 면모를 하나의 순간에 집약시킬 수 있..
※ 아래 글은, 2021년도 '동리•목월 문학상'의 시부문(목월문학상) 심사평이다. 심사는 김사인, 황인숙, 정과리가 했고, 심사평은 정과리가 집필했다. 심사위원들은 조용미 시인이 새 시집 『당신의 아름다움』(문학과지성사, 2020)에서 일취월장의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발견한 기쁨을 이구동성으로 토로하였다. 미적 취향이 각별히 섬세했던 시인은 이제 “생의 확고부동함과 지루함에 몸져” 눕는 경험을 통과하면서 “아는 말을 반쯤” 버릴 줄을 알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 무엇보다도 생체험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그 체험의 진실성을 스스로 납득하는 데서 오롯이 불이 붙는 시의 슻이 구워졌다는 데에 있겠다. 이로써 시인은 세계의 문제를 자신의 몫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그 몫을 제 몸 변신과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