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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구자창의 「무덤의 시간」은 의식의 끝까지 가보겠다는 의지가 뚜렷했다. 관념이 강해 묘사가 자유롭지가 못했다. 김채민의 「똑똑한 거지 공방」은 스마트폰을 통하여 쏟아지는 말의 홍수라는 오늘의 사회적 현상에 대한 예리한 풍자로 읽을 수 있다. 비판적 인식을 굳이 시로 쓸 때의 필연성을 더욱 고민했으면 한다. 박시현의 「화장」은 삶의 사건들을, 만남과 이별, 기쁨과 슬픔 등의 이분법으로 단순화시켜 감정을 고양시킨 후, 같은 단어의 다중적 의미를 통해 그 감정에 미묘한 그늘들을 입히고 있다. 이런 기교가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로 발전하려면 시야와 사색이 필요할 것이다. 「별 헤는 밤」 등 장효정의 시들은 삶의 세목들에 대한 섬세한 느낌들이 돋보였다. 그 느낌 너머의 세계가 유기적으로 펼쳐지지는 못했다. 「창경..
대학생의 시에는 새로운 시를 쓰겠다는 의욕과 진실에 대한 탐구와 과잉된 표현 충동이 한편에서 이글거리며, 다른 한편에선 새로운 어휘를 채집하지 못해 막막해 하고 진실의 통로를 열지 못해 조급해 하는 심사가 설익은 문체 위에서 종종걸음을 치는 민망한 광경이 동시에 전개되곤 한다. 투고된 대부분의 시들 역시 시의 초입에서 고투하고 있는 모습들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김성호의 「열쇠」, 김여진의 「‘자연의 신비’ 편」, 박서영의 「부탁」, 박신혜의 「거기」, 박종성의 「물고기자리」, 서동우의 「고생」, 신진용의 「칸토어 집합」, 전아영의 「귀천」, 조형민의 「잠자리의 죽음」, 채규민의 「존재의 인상」, 최혜령의 「벚꽃: 생동이 없고 창백하게 하얀 것」이 그 투쟁의 현장을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
늘 하는 얘기지만 시는 막연한 감상이나 사사로운 심정의 토로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삶의 기록이다. 사건이 있고 굴곡이 있고 반전과 완성이 있어야 한다. 이런 장구한 이야기를 최대한도로 압축할 때 시가 태어난다. 김영건, 김학수, 김현지, 남권율, 박상경, 박연빈, 서지민, 이유진, 정원, 정환빈, 한수정의 투고작들은 시의 초입에까지는 왔다. 말이 과장되었거나 이미지가 조악하거나 생각이 짧다는 결점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최지은의 「공허」는 특정한 사물을 삶에 대한 비유로 변용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 능력을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로 발전시키기를 바란다. 서자헌의 「옛날 이야기」와 박준모의 투고작들은 시가 근본적으로 리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자헌은 사물을 관찰하는 눈을 ..
시가 정서의 표현인 것은 맞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겪어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싸우는 사람만이 시에 전념할 수가 있다. 김은비의「속박」은 현실과 대적하고자 하는 의지를 열심히 표내고는 마지막에 그 대결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건 ‘나’ 자신과의 문제라는 깨달음을 대립구도의 간명한 변환을 통해 깔끔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재치가 돋보이지만 관념의 유희이기도 하다. 심은영의「행간의 좌초」는 글쓰기의 괴로움을 특정한 인생사의 실제 상황처럼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래 놓고는 꼬리를 사리다 보니 뒤가 허망하다. 추운 가을날 낙엽을 관조하고 있는 이경후의「덮다」는 관찰이 섬세하다. 그럼으로써 외부의 풍경을 세계와 갈등하면서 화해를 모색하는 절실한 내면의 드라마로 변환하는 데 ..
투고작들을 읽으면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력을 생각한다. 위기가 닥칠 때 인간은 그냥 견디거나 패배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영역과 범주를 넓히면서 위기를 재구성하고, 자신의 관할 안에 두려고 온갖 궁리를 꾀한다. 궁극적으로 자신과 이웃과 환경 사이의 네트워크가 개편되고, 인간의 본성이 질적으로 도약할 계기를 마련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격리의 시간은 젊은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대상들과 교섭하는 방식이 다변화되는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예년의 투고작들에서 대종을 이루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회라는 벨트 속으로 진입하기 전의 모든 입사준비자들의 생각은 거기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올해의 투고작들에서는 주제가 훨씬 넓었다. 자기에 대한 물음 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명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