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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해서 논쟁적인 -에드먼드슨의 『문학과 철학의 논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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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해서 논쟁적인 -에드먼드슨의 『문학과 철학의 논쟁』

비평쟁이 괴리 2023. 11. 16. 05:25

이 책(윤호병 역, 문예출판사)은 온건하고도 논쟁적인 저서, 아니, 온건하기 때문에 논쟁적인 저서이다. 뒤에서부터 말하자. 왜 논쟁적인가? “서구에서 문학비평은 문학이 소멸되어야 한다는 소원과 함께 출발하였다”는 도발적인 첫 문장에 그 논쟁의 핵자가 숨어 있다. 문학을 소멸시킬 것을 주장한 그 문학 비평이 바로 플라톤의 『공화국』이라면, 그 주장과 함께 출발한 것은 또한 철학에 의한 문학의 지배의 역사이다. 플라톤은 시인을 추방하려고 했고, 칸트는 문학을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떼어내어 “지옥의 변방으로 이동”시켰으며, 푸코․데리다 등의 현대철학자들은 문학을 전문가들만의 “복잡미묘한 놀이와 쾌락”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단토(Danto)의 용어를 빌어 “철학적 권리박탈”이라고 부른 서양 문학비평사의 진상이다.
논쟁은 두 개의 층위에 놓여 있다. 하나는 문학을 철학의 난해한 지배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저자의 단호한 투쟁 정신의 층위이다. 다른 하나는 플라톤과 칸트와 푸코를 그렇게 ‘싸잡아서’ 말하는, 철학자들을 당혹케 할 관점의 층위이다. 왜냐하면 어떤 철학자들은 철학의 역사를 ‘시인추방론’으로부터 문학을 구출해 진리와 자유의 전망대이자 싸움터로서 재정립하려고 고투해 온 역사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투의 방향은 분명 에드먼드슨의 그것과 다르다. 철학자들이 문학을 사회를 비판하고 반성케 하는 부정의 정신으로 보았다면, 이 문예 옹호가가 보기에 문학은 상상과 언어가 삶의 구체적 면면들과 어울리는 긍정적 화합의 장소이다.
이 책의 온건성은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 책은 비판된 철학자들의 주장을 성실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온건한 게 아니라, 문학을 일상적 삶의 차원으로 복귀시켜 그것의 시민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온건하다. 요컨대 저자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의 형제이다. 그러나 키팅 선생을 쫓아낸 것은 철학자가 아니라 완고한 형식주의로 중무장한 교육제도였다. 아무리 온건하려 해도 문학은 어느 시인의 말을 빌자면 “불온”할 수밖에 없다. 문학과 철학이 왜 자꾸만 ‘합작’하려 하는가?
번역은 성실하지만 둔하다. 눈을 부릅뜨고 읽어야 문맥을 제대로 쫓아갈 수 있다. 부정확한 용어들도 간간이 있다. 푸코의 『훈련과 처벌』은 『감시와 처벌』로 고쳐져야 하며, “예술의 철학적 권리 박탈”은 “철학에 의한 예술의 공민권 박탈”로 고치는 게 더 타당하다.
󰏔 2001. 1. 13, 조선일보, 문학은 상상과 언어와 삶의 합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