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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이윤기 선생을 추모하며 이윤기 산문집, 『위대한 침묵』(179쪽)/ 소설집, 『유리 그림자』(152쪽), 민음사, 2011, 각권 10,000원 이윤기 선생이 영면하신 건 작년 8월이었다. 그날 우리는 뛰어난 번역가이자 소설가이며 문장가였던 분을 잃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이의 남은 문향을, 유고 산문집/소설집을 통해서 맡는다. 맡는다? 그렇다. 선생은 무엇보다도 후각적인 존재였다. 보들레르가 「상응」에서 장려하게 보여주었듯이, ‘후각’은 장애물들 사이를 뚫고 가장 멀리 퍼져 나가는 감각이다. 이윤기의 고유한 문체는,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그이의 문장 한 줄만으로도 독자의 머리 속에 꽤 특별한 글 세상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였다. 게다가 후각은 또한 깊이 스며드는 감각이다. 그래서 거기서는 “정신과 ..
생활어로서의 한국어의 성찬 최일남 에세이, 『풍경의 깊이, 사람의 깊이』, 송영방 그림, 문학의문학, 2011, 296쪽, 13,000원) 한국에 수많은 글쟁이가 있지만, 한국어의 풍부한 어휘 자원을 자유롭게 골라가며 생각과 마음의 결과 꼴을 섬세하게 빚고 잣고 다듬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최일남 선생은 그 드문 이들 중의 한 분이다. 또한 한국어를 잘 다루는 이들이래도 한결같지 않고 취향이 각색이다. 어떤 분은 이쁘고 새초롬한 말들만 골라서 써서, 마치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장식품들을 보는 듯할 때가 있다. 최일남 선생의 어휘들은 모두 시정의 생활어에서 나온다. 그래서 ‘해토머리’, ‘얼금뱅이’, ‘아주까리’, ‘내남직없이’ 같은 말들도 귀한 한국어지만, ‘위의(威儀)’, ‘종용(從容)히’, ‘..
낯선 만남 속에 열리는 얼굴들을 위하여 ‘아시아를 사랑하는 시인들 주최’, 한·아시안 시인 문학축전 Korean-Asean Poets Literature Festival,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Becoming』, 2010.12.2.~12.7 네 분의 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의 주제가 우리의 행로를 묻고 있다면, 우리가 정말 행로를 몰라서 그런다기보다는 오늘 우리가 하나의 교차로에서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교차로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조금 낯설어 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대륙에서 비슷한 피부, 비슷한 윤곽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지 못할 까닭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교통 수단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
마침내 ‘선과 모터사이클관리술’이 왔도다! 로버르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Zen & the Art of Motocycle Maintenance - An Inquiry into values』, 문학과지성사, 2010, 799쪽, 18,000원 저 옛날 브왈로(Boileau)가 “마침내 말레르브가 왔도다!”라고 감격했듯이, “마침내 이 책이 왔도다!”라고 외치는 순간이 가끔은 있는 법이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도 그런 책 중의 하나이다. 출간 즉시(1973)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 소설은, 한국의 식자들에게도 곧바로 알려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제 3세계인만이 할 수 있는 유럽 현대사에 대한 증언 홋타 요시에, 『고야』, 전 4권, 김석희 역, 한길사, 2010, 각권 25,000원 이 책은 스페인의 화가 고야(1746-1828)의 전기가 아니다. 이 책은 고야의 일생을 동선으로 따라가며 스페인의 정치적 격변과 그에 대한 예술가의 성찰과 느낌 그리고 반응의 의미를 다룬 책이다. 왜 고야인가? “시대의 증언자로서의 예술가라는 존재방식이 전적으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고야를 통해 현대사의 발단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대의 증언자’는 단순히 묘사자가 아니다. 그는 “전쟁의 비참함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비참한 현실이 ‘그 자신’으로 하여금 무엇을 느끼게 하고 무엇을 ..
행동의 불가피성과 선택의 어려움에 대한 섬세한 살핌 — 프리모 레비, 『지금이 아니면 언제』(김종돈 옮김, 노마드북스, 2010(원본출간:1982))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과 마주치게 된다. 그 상황의 규모가 크든 작든 말이다. 두 갈래 길 앞에서 망설이는 개인의 선택으로부터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참여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무엇이든 그 결단의 몫은 언제나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그 자신에게로 귀속된다. 그리고 그 사실에 의해, 모든 결단에는, 그 개인의 전 존재 혹은 양심이 걸리게 된다. 그것은 결국 내가 세계에 대해 하나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며 동시에 세계의 변화에 한 줌의 에너지를 보태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가 세계 내에 속한 존재인 한, 세계의 변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