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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본문

울림의 글/소설읽기

피어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비평쟁이 괴리 2011. 8. 14. 10:18

마침내 선과 모터사이클관리술이 왔도다!

 

로버르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가치에 대한 탐구 Zen & the Art of Motocycle Maintenance - An Inquiry into values, 문학과지성사, 2010, 799, 18,000

 

저 옛날 브왈로(Boileau)마침내 말레르브가 왔도다!”라고 감격했듯이, “마침내 이 책이 왔도다!”라고 외치는 순간이 가끔은 있는 법이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도 그런 책 중의 하나이다. 출간 즉시(1973)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 소설은, 한국의 식자들에게도 곧바로 알려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한국인의 독서 취향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매우 길다. 오랫동안 단편에 길들여져 온 한국 독자들은 이런 분량의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몇 가지 예외가 있긴 한데, 그것은 온통 사건으로 가득 차 있는 소설들, 가령, 삼국지, 대망같은 것들이다. 또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심을 채워주는 일련의 대하소설들이 있다. 이 두 부류는 한국의 독자에게 느낌만을 꽉 채워줄 뿐 성찰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머리에 쥐를 내지 않는다. 다음 이 소설에는 아주 구체적인 일상에 대한 묘사와 철학적인 질문이 겹쳐져 있다. 이런 소설을 두고 한국의 비평가들은 간혹 관념적이라는 잘못된 용어를 붙여서 제껴 놓곤 하는데, 이는 한국인이 생각이 많은 글을 싫어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이 많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조지 오웰은 유럽의 독자들이 단편을 싫어하는 까닭에 대해 조소적인 답변을 내놓은 적이 있는데, 주제가 자꾸 바뀌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추어 본다면, 한국인의 단편 취향은 주제가 자주 바뀌는 것을 좋아하되, 한 주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즉 한국인은 재빨리 결론 나는 생각들을 좋아하고 굴곡이 복잡한 생각을 잘 읽어내지 못하며, 더 나아가 그 재빨리 결론 나는 생각들을 액세서리 갈아치우듯 자주 바꾸는 걸 좋아한다는 뜻이 된다. 우리의 고질로 흔히 거론되는 냄비성향과도 얼마간 상통하는 얘기다. 그런데 이 소설은 사실 매우 특이한 소설이다. 왜냐하면, 아주 단순한 이분법에서 출발해서 점점 복잡하게 생각의 덩굴을 만들어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모터사이클과 선, 공학과 명상, 전원과 문명이라는 간단한 도식만이 보인다. 그러나 슬그머니 공학의 명상성과 명상의 공학성을 분화시키고 다시 빛 반사 놀이를 하듯 그것들에 거듭 반대 가치를 끼워 넣음으로써 독자를 서서히 삶의 질들의 거대한 미궁 속으로 안내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 방법을 찾아내게 된 데에는, 작가가 군복무를 한 한국에서 이방의 친구들과 성벽을 만난 경험도 얼마간 관련되어 있다니, 참 산다는 것의 미묘로움을 느낄만하지 않은가? 여하튼 이 학수고대하던 책을 무려 37년만에 장경렬 교수의 번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노고에 거듭 경하의 마음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쓴 날:2010.12.20.; 발표: 간행물윤리위원회 좋은 책 선정위원회 선정 이 달의 좋은 책, 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