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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평화를 함께 찾아가는 길— 이성복의 『그 여름의 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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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평화를 함께 찾아가는 길— 이성복의 『그 여름의 끝』

비평쟁이 괴리 2024. 1. 26. 08:10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1990)은 이성복의 세번째 시집이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와 『남해 금산』을 거쳐 그가 다다른 이번 시집의 세계는 그의 시적 주제는 이전과 변함이 없는데, 그의 시적 관점은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의 시는 언제나 고통과 평화 사이에 있었다. 시인은 말한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장 더러운 진창과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정결한 나무들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들이 모두 다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함께 있지 않아서 일부러 찾아가야 한이 그것들 사이에 찾아야 할 길이 있고 시간이 있다”(「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시는 언제나 고통과 평화를 함께 찾아가는 시간이며, 길이었다. 그 시간은 그러나 수많은 나날과 수없는 고장을 거쳐 가면서, 끊임없이 새 길을 내어 왔다.
첫 시집의 그 길이 치열한 반성적 해부의 길이었다면, 『남해 금산』의 그 길을 통해 시인은 고통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그 속에서 인고의 평화를 길어내었었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이제 고통이 지나간 뒤의 세상에 대해 말한다. 시인이 말하는 고통 뒤의 세상은 고통이 가라앉은 세상이 아니라, 얼핏 평화롭지만 고통이 저 깊은 곳에서 다친 몸을 힘겹게 뒤채이고 있는, “얼룩이 지고 비틀려 /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아있는 세상이다. 그 세상엔 “헐어터진 소 잔등 같은 산길”이 “오래 전에 끝난 흐느낌처럼 …… 흘러내리고 있”고, 그 세상은 맛있게 고기를 먹다보니 “입가에 피범벅을 한 세상이 어그적어그적 고기를 씹고 있”는 왼통 도살장인 세상이다. 세상은 무성하고 푸르르나, “세월의 무덤처럼” 푸르른 세상이다. 
그러나, 이번 시집의 초점은 세상의 허위를 해부하는데 있지 않으며, 또한 삶의 끔찍스러움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데에 있지도 않다. 이번 시집이 독자에게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파묻힌 고통이 “고요히 전율”하면서 펼쳐내는 삶의 풍경들이다. “목숨이 지나간 자리는 아직 푸른빛이었습니다”고 말하는 시인은 고통하는 몸짓이 곧 삶의 표징임을 본다. 그는 그곳에서 “정갱이가 부러진 것들이 자꾸 일어서려 하”고 “눈 녹은 진흙창 위로 꺾인 뿌리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다. 그때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지 않는가? 고통 저 너머의 평화의 아득함과 고통이 고통의 몸으로 실천하는 평화의 몸짓이 동시에, 한 몸체로 있다.
『그 여름의 끝』은 고통 속에서 피어오르는 생명의 시이다. 고통 속에 생명이 있다고 주장하기는 쉬우나 그 실제를 되살리고 그것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이성복의 시집을 구축하고 있는 대화 구조, 다의적 구문, 조용히 공간을 넓히는 움직임 등 그의 시의 독특한 상관적 구조는 그 자체가 고통 속에 피어오르는 생명의 몸짓이어서, 독자를 그 생명과 삶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설레임으로 덥혀 준다. 그것은 그것을 ‘사랑의 시’로 읽거나 ‘해탈의 시’로 읽는 성급한 해석들을 성큼 뛰어넘는다.( 『서울신문』1990.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