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울림의 글/시집 읽기 (28)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지극히 검박한 표지가 암시하듯, 정현옥의 시집, 『띠알로 띠알로』(도서출판 가림토, 2012)는 소박한 시들의 모음이다. 그러나 가만히 읽어 보면 시인의 섬세한 눈길과 겸손한 태도가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호응의 물결을 일으킨다. 가령, 귀까지 멀었는데 파도 소리는 노인의 꼬부라진 잠까지 따라와 가슴을 쥐어박는다 (「홀트 서핑」부분) 같은 시구는 소수자의 내면에 갇힌 삶에 대한 열정과 그 절실함과 안타까움을 여실히 전달하고 있으며, 처마 끝 우설(牛舌)이 피운 연꽃을 보다 입안에 혀만 말아 넣었다 (「개심사」 부분) 같은 시구는 대상에 대한 시인의 허심탄회한 수용성과 겸손한 자세, 그리고 섬세한 언어감각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우설’은 절 건물의 ‘쇠서받침’을 뜻한다.) 사람들이 떠난 강제철거지를 ..
오정국의 『파묻힌 얼굴』(민음사, 2011)은 괴이한 풍경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그의 시들이 모든 이후의 장소에서 첫 날의 환희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파장에서 개업을 꿈꾸고 하수도에서 상수도를 그리며 인생이 다 끝나 간 자리에서 청춘을 목말라 한다. 마치 노파가 초야의 기대로 들떠 있는 것과 같다. 도대체 이런 묘사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시가 본질적으로 실패한 인생, 주저앉은 의욕들, 꽃으로 피지 못한 채 밟힌 싹들과 공동의 정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루저들의 대변인이다. 그러한 사정을 그의 시 한 편은 다음과 같이 명료히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만약 진흙이 아니라면, 숨 막히는 만삭의 보름달을 통과하여 당신 어깻죽지의 날개가 되었겠고 만약 이것이 진흙이 아니..
올해 출간된 시집 중, 심보선의 『눈 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1), 이수명의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문학과지성사, 2011), 이준규의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문학과지성사, 2011), 『삼척』(문예중앙, 2011)은 그 시적 외양들이 판이한 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집합 안으로 묶을 수 있고, 그 집합은 한국문학에 새로운 어법을 제공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어법을 잠정적으로 나는 ‘행언(行言)’의 어법이라고 명명하였는데, 그것은 언어가 그 자체 행동으로서 나타난다는 뜻이며, 따라서 언어가 주어도 목적어도 없이 오로지 동사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나는 이런 생각을 아주 조금만 늘려서(다시 말해 모든 시들을 두루 살피는 일까지는 못한 채로), 한 편의 글을 썼는데, 계간..
외국의 시를 읽고 공감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과 달리 시는 오로지 언어의 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번역은 매개가 아니라 장애가 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클로드 무샤르 교수가 “번역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했을 때 내 머리를 때리며 지나간 번개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번역의 불가피성의 문제를 넘어서, ‘내재성’이라고 해야 할 그런 성질이다. 우리는 매번 서로의 코드를 확인하고 상대방을 번역하면서 교섭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 오류를 범하면서, 계속 그 오류를 고치려고 애쓰면서. 저 옛날 바슐라르가 ‘인식론적 장애물’이라고 부른 것은 이제는 번역 장치의 호환성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바슐라르는 저 ..
이수명의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문학과지성사, 2011)을 읽다가 이전 시집에 비추어 어떤 변모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변모라기보다는 확대로 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는 여전히 그만의 특장인 면모들을 세차게 밀고 나가고 있다. 즉 주체는 희미해지고 동작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 동작들이 기호들로 추상화되고 그 과정에서 동작이 주체로의 변신과 소멸을(왜냐하면, 그의 시에서 주체는 소멸의 운명에 ‘처’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을 꿈꾸는 게 아니다. 운명을 겪고 있는 것이다) 번갈아 되풀이한다는 점, 그런 것들이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그만의 시적 특징들이다. 내가 그의 이번 시에서 어떤 변모, 사실상의 확대를 느낀 것은, 낯선 타자들이 툭 튀어나온 광경들이 빈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