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정현옥의 『띠알로 띠알로』 본문

울림의 글/시집 읽기

정현옥의 『띠알로 띠알로』

비평쟁이 괴리 2012. 4. 21. 12:48

지극히 검박한 표지가 암시하듯, 정현옥의 시집, 띠알로 띠알로(도서출판 가림토, 2012)는 소박한 시들의 모음이다. 그러나 가만히 읽어 보면 시인의 섬세한 눈길과 겸손한 태도가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호응의 물결을 일으킨다. 가령,

 

귀까지 멀었는데

파도 소리는 노인의 꼬부라진 잠까지 따라와

가슴을 쥐어박는다 (홀트 서핑부분)

 

같은 시구는 소수자의 내면에 갇힌 삶에 대한 열정과 그 절실함과 안타까움을 여실히 전달하고 있으며,

 

처마 끝 우설(牛舌)이 피운 연꽃을 보다

입안에 혀만 말아 넣었다 (개심사부분)

 

같은 시구는 대상에 대한 시인의 허심탄회한 수용성과 겸손한 자세, 그리고 섬세한 언어감각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우설은 절 건물의 쇠서받침을 뜻한다.) 사람들이 떠난 강제철거지를 그리고 있는 공동주거, 최근에 읽은 비슷한 성격의 시들 중에서 가장 울림이 깊다고 할 수 있다.

 

 

함부로 허물지 마라

고개를 흔드는 붓꽃이

마당 내려설 때 헛기침하던

주인을 대신 한다

돌쩌귀 떨어져나간 정지문이

바람에 어긋난 관절을 추수른다

마루 밑 끈 떨어진 슬리퍼 한 짝은

방치가 아니라는 말

그러니까 동고동락의 증거이자 동행의 빌미다

문살에 덧붙여진 신문지에

물 맞은 대통령이야 끼지 못해도

초막의 명창 귀뚜라미의 세레나데가 있다

별채의 거미도 세 들어 산 지 오래

분리주거가 되더라도

입주권을 가질 자격은 다들 갖추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 쫒겨갔다 해서

이주가 끝난 것은 아니다

철거단지에서 버티는 목숨들이

포크레인과 맞서고 있다.

 

독자는 마루 및 끈 떨어진 슬리퍼 한 짝은 / 방치가 아니라는 말 / 그러니까 동고동락의 증거이자 동행의 빌미다를 읽으며, 슬리퍼 한 짝에 인간만이 연민compasssion’을 가지고 있다는 레비나스의 말이 새겨져 있는 듯한 환상에 문득 빠지며, “물 맞은 대통령이야 끼지 못해도 /초막의 명창 귀뚜라미의 세레나데가 있다는 구절이 풍기는 수수함만큼이나 은근한 풍자에서 감칠 맛을 느낀다. 흥미로운 것은 분리주거가 되더라도의 미묘함이다. 이 독립된 한 행은 슬그머니 분리수거를 떠올리게 하는데, 시의 전반적인 어조는 그런 생각의 이월을 부추기고 있지 않다. 요컨대 그의 시들에서 되풀이해서 읽는 대목들은 감춤이라는 자기 억제의 움직임 속에 감싸여져 있다. 그리고 시의 표면은 이 잘 보이지 않는 감춤과 소박한 드러남의 교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도 이 시인이 무명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나는 이 시집을 통해 시인을 처음 접한다) 시인의 그러한 독특한 태도와 연관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2012.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