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오정국의 『파묻힌 얼굴』 본문

울림의 글/시집 읽기

오정국의 『파묻힌 얼굴』

비평쟁이 괴리 2011. 11. 1. 06:57

오정국의 파묻힌 얼굴(민음사, 2011)은 괴이한 풍경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그의 시들이 모든 이후의 장소에서 첫 날의 환희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파장에서 개업을 꿈꾸고 하수도에서 상수도를 그리며 인생이 다 끝나 간 자리에서 청춘을 목말라 한다. 마치 노파가 초야의 기대로 들떠 있는 것과 같다.

도대체 이런 묘사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시가 본질적으로 실패한 인생, 주저앉은 의욕들, 꽃으로 피지 못한 채 밟힌 싹들과 공동의 정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는 루저들의 대변인이다. 그러한 사정을 그의 시 한 편은 다음과 같이 명료히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만약 진흙이 아니라면, 숨 막히는 만삭의

보름달을 통과하여

당신 어깻죽지의 날개가 되었겠고

 

만약 이것이 진흙이 아니라면, 내 눈을 멀게 한

태양의 흑점을 뚫고 나가

여름날의 장미가 되었겠 (진흙들 재의 길, 재의 몸, 부분)

 

지만 그러나 진흙인 것이다. 진흙으로 날개를 만들 수 없고, 진흙이 장미로 피어날 수도 없다. 그 좌절, 그 실패는 그러나 오정국적 존재들을 마냥 의기소침케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그 좌절과 실패 만큼이나 성공과 돌파의 욕망은 정확히 대칭적으로 들끓는다. 그래서 못 이룬 꿈, 못 다한 한이기 때문에 그 열망의 강도는 정상의 범위를 지나 엽기적일 정도로 증폭된다. 날개가 되기 전에 이미 보름달을 통과했고, 장미가 되기 위해 흑점을 먼저 뚫고 나간다.

오정국 시의 묘미는 이러한 극단적 의지를  한결같이 쉼없이 뿜어내면서 좌절의 최하수준과 욕망의 최고수준에 똑같이 에너지를 부여해, 양 쪽의 삶의 길을 동시에 겹쳐 놓는 분열적 상상력에 있다. 그의 의지는

 

꽃봉오리 열리다가 멎어 버린 듯, 당신이 눈독 들인 이 자리는

더 이상 파먹을 게 없는

구멍, 가시 (굶주림이 나를 키워, 부분)

 

가 되고 만 것인데, 그 구멍, 가시의

 

어떤 눈빛은 야차 같고, 어떤 눈빛은

캄캄한 우물 같 (그렇게 눈빛을 마주치고는 절벽의 꽃 2, 부분)

 

지만, 그것들은 실은 똑같이 진흙 덩어리, 흠뻑 젖은 / 빛의 범벅들이서, 그렇게 야차-우물인 채로, “암약하고 흘러다닌다.

 

내 등뒤에서 암약하던

밤의 수렁들, 땅 밑의 물길을 따라

야차처럼 흘러다니던

밤의 짚신벌레들 (진흙들 골목의 입구)

 

독자는 앞앞에 인용된 시구가 두 개의 눈빛을 한 행에 모아 놓아 두 이질적 움직임의 연결성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마지막으로 인용된 시구의 첫 행과 세 번째 행이 연결되고, 두 번째 행과 네 번째 행이 연결되어, 마치 서로에 대해 꼬인 두 가닥 줄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눈여겨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광경은 썩 도발적이다. 다시 말해 독자의 눈을 춤추게 한다. (2011.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