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이수명의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본문

울림의 글/시집 읽기

이수명의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비평쟁이 괴리 2011. 9. 29. 15:56

이수명의 시집,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문학과지성사, 2011)을 읽다가 이전 시집에 비추어 어떤 변모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변모라기보다는 확대로 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는 여전히 그만의 특장인 면모들을 세차게 밀고 나가고 있다. 즉 주체는 희미해지고 동작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 동작들이 기호들로 추상화되고 그 과정에서 동작이 주체로의 변신과 소멸을(왜냐하면, 그의 시에서 주체는 소멸의 운명에 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을 꿈꾸는 게 아니다. 운명을 겪고 있는 것이다) 번갈아 되풀이한다는 점, 그런 것들이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그만의 시적 특징들이다. 내가 그의 이번 시에서 어떤 변모, 사실상의 확대를 느낀 것은, 낯선 타자들이 툭 튀어나온 광경들이 빈번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광경들에 비추어 보자면, 전 시집들에서는 주체가 희미해져가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의 육체성이 분명히 감지되었는 데 비해, 이번 시집에서는 는 분해되어 이리저리 날아가 타자들이 되어 버리고 는 오로지 응시로서만 남는다. 가령 이런 시구가 그렇다.

 

내 머릿 속에 있는 손들이 나를 떠나 / 너에게 날아가 앉았을 때 / 너에게 가서 비로서 너의 형식이 되었을 때에 // 나는 그쳤다. // 내가 그친 후 나를 목격했다. 내가 더 이상 너와 교환되지 않았을 때에 (토르소)

 

내 손들이, 즉 내 것들이 너의 형식이 되면, 너와 나는 더 이상 교환되지 않는다.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혹은 나의 의지를 벗어난 상태에서 타자는 마구 번식하며 나를 위협한다.

 

콩이 반복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 콩을 가려낼 수 없는 것이다. (검은 콩 모티프)

 

그러나 이 타자들, 나의 통제를 벗어나는 낯선 것들은, 나의 주체성을 회수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그런 타자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무의미한 채로(즉 어떤 의도도 가지지 않은 채로) 시적 공간을 휘젓고 다닌다. 시의 벽은 금이 가고 시의 창문은 깨어지고, 시의 방 안에는 잡동사니로 변한 것들이 굴러다니고 쌓인다. 시의 관계는 모두 깨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런 광경을 응시하는 텅빈 동공 속에는(왜 텅빈 동공이냐 하면, 주체가 응시로만 남는 그 순간 주체는 오로지 목격되는 자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친 후 나를 목격했다와 같은 진술이 성립되는 것이다), 묘한 즐거움이 있다. 아마도 주체됨의 욕망이 결정적으로 무너진 상황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11.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