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울림의 글/시집 읽기 (28)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정한아의 시들 밑바닥에 슬픔의 감정이 가득 고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장문의 「시인의 말」에는 ‘우산’ 대신 Enough to say it’s far라는 제목의 시집을 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시집은 박재삼의 영역시집, 『아득하면 되리라』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독자는 정한아가 박재삼과 정서적 친연성이 있다는 점을 환기하고, 그의 시를 들춘 순간 근원을 알기 어려운 슬픔을 얼핏 엿본 느낌을 되짚게 된다. 근원을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인적인’ 근원을 알 수 없다는 말이고, 담화적 근원, 즉 독자와 함께 이루는 사회적 세계에서 슬픔이 미만하게 된 원인은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상황은 붕괴되었는데 인간은 멀쩡히 살아 있는 사태에 ..
유희경의 『오늘 아침 단어』(문학과지성사, 2011)는 일기체의 수필 형식과 사막을 걷는 듯한 기형도풍의 메마른 묘사의 합성을 기본 형태로 삼고 있다. 수필은 자기 확인의 장르이다.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보고 지나친 것을 쳐내고 희미한 것을 강조해 지나온 삶에 의미를 부여하여 심리적 안정을 얻고자 하는 운동이다. 일기는 말할 것도 없지만 대부분의 수필이 하루의 일과가 끝난 후에 씌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삶에 대한 질문이 있고 고통스러웠던 사건이 있으며, 회오와 반성이 있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은 다듬어지게 된다. 다듬어져서 ‘나’의 개인 유산으로 정돈되어 언어의 서랍 속으로 들어가 보존된다. 그리고 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반성조차도 고즈넉한 졸음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것이 일기..
이정주의 시집 『홍등』(황금알)을 읽는다. 아주 오래 전에 그의 시를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홍등』을 읽으면서 개성적인 시인 한 사람이 어둠 속에 가두어져 있었다는 걸 알겠다. 그렇게 되는 사정에는 나를 포함해 비평가들의 게으름이 가장 큰 원인이라는 건 두말할 게 없다. 한국 비평의 특징적 욕망인 아젠다 주의(아젠다 주의는 말을 험하게 하면 ‘건수 주의’다)도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리라. 아젠다 주의는 깃발을 올릴 것만을 골라내는 매우 인색한 여과기를 장치하고 있다. 여하튼 『홍등』의 개성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시는 「실크로드」다. 거기에는 미싱을 타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녀가 짜는 옷감으로부터 실크로드가 태어나 한 자락 사막으로 펼쳐지고 미싱 바늘로부터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