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울림의 글/소설읽기 (103)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마침내 ‘선과 모터사이클관리술’이 왔도다! 로버르 M.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Zen & the Art of Motocycle Maintenance - An Inquiry into values』, 문학과지성사, 2010, 799쪽, 18,000원 저 옛날 브왈로(Boileau)가 “마침내 말레르브가 왔도다!”라고 감격했듯이, “마침내 이 책이 왔도다!”라고 외치는 순간이 가끔은 있는 법이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도 그런 책 중의 하나이다. 출간 즉시(1973)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 소설은, 한국의 식자들에게도 곧바로 알려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제 3세계인만이 할 수 있는 유럽 현대사에 대한 증언 홋타 요시에, 『고야』, 전 4권, 김석희 역, 한길사, 2010, 각권 25,000원 이 책은 스페인의 화가 고야(1746-1828)의 전기가 아니다. 이 책은 고야의 일생을 동선으로 따라가며 스페인의 정치적 격변과 그에 대한 예술가의 성찰과 느낌 그리고 반응의 의미를 다룬 책이다. 왜 고야인가? “시대의 증언자로서의 예술가라는 존재방식이 전적으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고야를 통해 현대사의 발단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대의 증언자’는 단순히 묘사자가 아니다. 그는 “전쟁의 비참함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비참한 현실이 ‘그 자신’으로 하여금 무엇을 느끼게 하고 무엇을 ..
행동의 불가피성과 선택의 어려움에 대한 섬세한 살핌 — 프리모 레비, 『지금이 아니면 언제』(김종돈 옮김, 노마드북스, 2010(원본출간:1982))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과 마주치게 된다. 그 상황의 규모가 크든 작든 말이다. 두 갈래 길 앞에서 망설이는 개인의 선택으로부터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참여하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무엇이든 그 결단의 몫은 언제나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그 자신에게로 귀속된다. 그리고 그 사실에 의해, 모든 결단에는, 그 개인의 전 존재 혹은 양심이 걸리게 된다. 그것은 결국 내가 세계에 대해 하나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며 동시에 세계의 변화에 한 줌의 에너지를 보태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가 세계 내에 속한 존재인 한, 세계의 변화를..
집단적 이상심리로부터 개인의식의 저항으로 ― 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기』(문학과지성사, 2010, 315쪽, 11,000원) 임철우의 소설은 1980년 광주항쟁과 더불어 태어났다. 작가는 그 사건을 현장에서 겪었고 그 의미를 캐내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말 그대로 5월 광주의 모든 것을 소설의 광주리 안에 담으려 하였다. 그는 그것의 필연성과 우연성이 혼재한 양상을 동시에 포착하려 하였다. 또한 그것의 정치‧사회적 측면을 넘어서 집단 심리의 심층에까지 다다르려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항쟁을 총체적으로 재현한 『봄날』(1997)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이후 임철우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듯이 보였으며, 꽤 오랫동안 침묵에 빠졌다. 『등대』와 『백년여관』을 상자했으나 언어 훈련의 성격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