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울림의 글/소설읽기 (103)
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성중은 첫 창작집 『개그맨』으로 자신의 문학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우선, 아이디어를 가공하는 능력이 있다. 글로써 온갖 것이 말해진 시대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내가 얼마 전 오늘의 한국 소설에 아이디어가 백출하고 있다고 쓴 것은, 그것이 이른바 현실적 구속력(소위 개연성)을 벗어나 자유롭게 뻗어나가고 있다는 뜻으로 쓴 것이지, 그 아이디어가 실은 다른 문화들 심지어 기존의 소설에서 이미 나왔던 것이라는 점을, 심지어, 그 참조된 텍스트의 아이디어조차도 또 다른 복제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인한 것이 아니었다. 『개그맨』의 텍스트들도 그 복제의 흐름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가령, 첫 두 소설은 주제 사라마구José de Sousa Saramago나 코..
김선재는 젊은 소설가인 모양인데, 『그녀가 보인다』(문학과지성사, 2011)는 그의 개성과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우선 그의 작품들은 의문을 의문으로서 끝까지 몰고 가는 데 성공하고 있다. 서투른 작가들은 독자의 궁금증을 자신의 조급증으로 옮겨 와 서둘러 답을 내놓거나 아니면 자신이 제기한 의문에 스스로 포박되어 도중에 길을 읽곤 하는데, 김선재는 그가 설치했으나 그가 풀어야 할 미로를 냉정하게 따라가 마침내 막바지에 이르러 해답 그 자체가 아니라 해답의 실마리를 쥐는 데까지 이른다. 그 막바지는 처음에 제기된 사소한 의문이 삶의 의미 전체로 확대되는 때이다. 다음, 그는 젊은 소설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환상을 거꾸로 사용함으로써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환상을 욕망..
사랑은 미래이고, 미래는 자유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김이선 옮김, 민음사, 467쪽, 14,000원 이 작품은 우선은 희귀성 때문에 선정되었다. 이란의 현대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경험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문학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리키는 상징적 지표 중의 하나이다. 이제 우리는 영·불·독·서의 문학만을 세계문학이라 하지 않는다. 세계의 모든 곳에서 생산된 문학이 세계문학이다. 지구상의 모든 곳에 독특한 개별문학들이 세계문학을 형성하는 생생한 생명체로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책을 여는 순간, 독자는 그 안의 언어생명체가 우리의 기대 지평을 훌쩍 넘어서는 것을 보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저『아라비안 나이트』의 천변만화가 여기에서도 펼..
김종호가 쓰고 허남준이 삽화를 그린 『인어공주이야기』(문학과지성사, 2011)는 민담 「인어공주」의 현대적 변용이다. 이해를 위한 몇 줄의 노트를 적어둔다. (1) 이것은 ‘일종의 고쳐 베끼기’의 형식을 갖는다. 일반적인 고쳐 베끼기는 대체로 원본에 대한 ‘비판적인’ 의도를 품고 있으며, 따라서 흔히 ‘패러디parodie’적 실천을 보여준다. (2) 그러나 이 소설은 패러디가 아니다. 바흐찐Bakhtine의 용어를 빌리자면, 패러디가 아니라 ‘문체화stylisation’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원본의 세계관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확장하거나 변주시키는 것. (3) 작가의 의도는 인간 영혼의 보편적 심리를 현대의 사회적 문제로 치환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적 문제를 말하기 ..
사회성의 회복 김이설, 환영, 자음과 모음, 2011, 195쪽, 10,000원 요 근래의 한국 소설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보인다면, 그것은 1990년대 이래 희미해져 가던 사회성을 회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20년 동안 한국소설은 개인성의 정원에서 화려하게 피었다.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있긴 있었는데, 대체로 가족과 친구의 둘레에서 그쳤다. 개인성 바깥에서 많은 작가들은 가깝거나 먼 역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치 현대 사회에는 문제가 없는 듯이 말이다. 고 박완서·이청준 선생을 비롯한 몇몇 노장 소설가들만이 사회성을 간신히 지키고 있었다. 그랬는데 2000년대 말부터 젊은 신진작가들에 의해서 사회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백수와 루저에서 시작하다가 차츰 룸펜 프로레타리아를 거쳐 산업 노동자의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