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2000년『현대문학』‘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시’ 해설 본문

심사평, 추천사 등

2000년『현대문학』‘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시’ 해설

비평쟁이 괴리 2022. 12. 8. 08:55

* 고재종의 장엄

서정의 극점을 비추는 시다. 극점이 보인다는 것은 서정의 표준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서정을 세계의 자아화라는 말로 요약한다면, 이 시는 그 자아화의 끝에서 문득 자아의 소멸을 겪는다. 그 충만과 소멸 사이의 긴장을 장엄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서정=세계의 자아화'라는 상투적인 규정이 매우 그릇된 것이라는 견해를 글로 만든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길 바란다: 서정을 규정하는 이 땅의 희극에 대해서: ‘한국적 문학 장르규정 재고 세계의 자아화라는 허구 혹은 보편적 자아의 끈질김, 한국적 서정이라는 환을 좇아서(2020). 이 견해에 근거하면, 「장엄」은 차라리 '서정의 근본'에 육박했다고 해야 하리라.

 

* 김영승의 瀕死聖者

김영승은 자조를 아주 능글맞게 표현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 능글맞은 태도는 그가 자조를 즐기기조차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교묘한 간지가 숨어 있다. 그것은 이중적인데, 즉 그 자조를 바탕으로 시인을 비참케 하는 세상의 온갖 적들을 공격하며(약한 자를 못살게 구는 자들은 얼마나 악한 자들인가), 동시에 적들의 공격을 통해서 그만큼 자신은 정신적인 높이를 획득한다는 것이다(악한 자들에게 시달리는 것은 항상 성자의 특권인 법). 물론 시의 재미는 그 태도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 능글맞은 태도에 상응하는 능청스런 말 재주이다. 이 타고난 시인은 개구(開口)와 발성 사이의 시간이 제로치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니, 그 능청스런 말재주는 그만큼 적들과 자신 사이의 거리도 없애 버린다. 그의 적들에 대한 공격이 풍자가 아니라 해학으로 골인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파괴되는 적의 파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공격적 풍자는 항상 일정한 거리를 필요로 하는데, 김영승의 천연덕스런 공격에는 그 거리가 존재하지 않아 그의 공격은 함께 견디는 수난이 되고, 그가 재주를 부려 낚아채려 한 정신적 품위는 함께 사는 자의 기묘한 비애로 바뀌는 것이다.

 

* 김정환의 사랑노래 2

김정환이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여기는 부동의 심연이다. 언제나 콧김을 거칠게 내뿜는 철마였던 그의 시가, 육중해서 더욱 역동적이었던 그것의 움직임이 마침내 멈춘 것이다. 왜 멈추었는지는 묻지 말기로 하자. 시는 논리도 상황도 아니므로. 아니 논리 이전이고 상황 다음이거나, 상황 이전이고 논리 다음이므로. 중요한 것은 그가 철마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정지의 자리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었다는 것이다. 보라, 그는 "매끈하고 육중한 자동차 전시장"을 기어코 말하지 않는가? 그것이 그의 육체다. 그 육체가 정지하고 있다면, 육체의 반대말은 정신이 아니라, 정지한 육체 대신에 날렵히, 가볍게 춤추는 다른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눈()이며, 좀 더 정확하게는 바깥에서 날리는 눈이다. 왜 바깥인가? 자동차는 시방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는 눈의 화려한 "말살"로부터 보호되며, 더 나아가 무언가를 통해 여전히 움직인다. 그 움직이는 것, 그것은 바로 눈()이며, 좀 더 정확하게는 바깥 너머를 응시하는 눈이다. 응시의 눈을 통해서 시인은 내 바깥의 눈 바깥의 ''를 찾아낸다. 시의 제목이 사랑노래인 것은 그 때문이며, '자동차'와 함께 "숯검댕 낀 초록색 공중전화 부스"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공중전화 부스는 물론 움직이지 못하는 자가 통화하는 비밀 통로이다. 이 시의 기본 대립은 눈/눈의 대결이며, 동음성이 마련한 긴장의 밀도로부터 추진력을 받아 사랑으로 진화하는 것이 이 시의 내부 서사이다. 그는 끝끝내 변증법을 포기하지 않았다.

 

* 김태동의 흐르는 꽃잎이여

김태동은 점점 집단적 삶에 참여하고 있다. 참여라는 어사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참여는 동화(同化)가 아니다. 동화가 아니라는 것은 그가 집단과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그가 집단을 형성한다는 말이다. 참여가 동화와 다른 또 하나는 동화가 주체의 신비화를 목표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참여는 주체의 망실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나는 가고 오는 계절이 되나 흘러다니는 공기가 되나 흔적을 찾은들 무슨 비애가 물결치나"의 마지막 구절은 그 망실을 직접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주체는 망실의 과정 속에 있을 뿐 전적으로 망실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시쓰기의 주체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주체는 육신의 해체를 겪게 되는데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마지막 미련 남아 있어 이 서늘한 심장을 어디에 놓아두어야 할지"'서늘한 심장'이다. 그것은 그가 참여해 이루는 집단적 삶이 운명적 고난이기 때문이다. 참여는 주체만이 할 수 있는데 고난의 운명은 주체의 비주체화를 낳는다.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주체의 비주체화가 이성의 의지에 의해 실천된다면 남는 것은 가슴이되, 그러나 참여의 운동력은 그 가슴에도 작용하여 그 가슴을 서늘한 심장, 다시 말해 의지에 베임으로써 의지를 비추는 거울로 변형된 심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 남진우, 화려한 유적

남진우의 시는 문명 사회에 대한 가장 화려한 조종(弔鐘)이다. 그는 문명 사회를 "오랜 연옥의 시절"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래다'는 것은 오래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아주 오래 갈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오래 갈 연옥에 달라붙어 있는 게 항상 있는데, 이를테면 담쟁이 덩쿨이 그것이다. 그 덩쿨은 한편으로 문명의 연옥을 가리면서 동시에 문명사회의 연옥성을 부각시킨다. 그것은 문명에 기대어 사는 자연이며 동시에 문명을 추문으로 만드는 자연이다. 그 덩쿨의 실물은 무엇일까? 시가 바로 그것?

 

* 박남철, 고래의 항진

"꼬리로 바다를 치며 나아가"는 것은 분명 고래이다. 그 고래는 고래 아닌 것들을 마구 치면서 나아간다. 그때 "나는 이미 바다이고 바다는 이미 나다." 여기에서의 ''는 고래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고래이고 고래는 또한 나이다"에 와서 나와 고래는 분리된다. 여기에서의 ''는 화자이며, 화자로서의 ''가 인물로서의 ''로 돌변하였다. 인물로서의 ''와 인물로서의 고래는 엄연히 다른 두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인물 ''가 하는 말은 "나는 이미 고래이고 고래는 또한 나이다"라는 나/고래의 분별의 거부이다. 앞에서 고래는 고래 아닌 것들을 마구 배제하면서 나아갔다. 다시 말해, 분별의 극단을 실천한 것이다. 그런데, 화자 ''가 무대로 뛰어들자마자 ''는 모든 분별을 거부한다. 고래가 분별을 집행하면서 양양히 과시한 그 힘을 그대로 빌어서 말이다. "타아앙...." 몰아치면서. 한데, 그 힘을 빌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분별의 거부가 실은 분별이다. 그것은 분별은 거부하는 것들은 모두 틀렸다고 윽박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분별하지 않는 것이 실은 분별하는 것이 아닌가? 잘 분별하는 것이 실은 분별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닌가? 이 시의 묘미는 이러한 인식론적인 물음을 각성 촉구의 형식으로 제시하는 데에 있다. 바로, '타아아아아앙...."하는 그 분별의 억센 힘을 그대로 실어서 말이다.

 

* 송재학, 눈의 무게

송재학은 자주 정의를 한다. 그 정의는 학술적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대상을 하나의 주체로서 세워주고자 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그 마음 운동 주위에 깨달음이라는 인식론적 의미소, 겸손함이라는 도덕적 의미소가 붙어 있다. 그러나 거기에 붙은 가장 중요한 전자(電子)는 상대방의 살아있는 육체를 느끼는 체감이라는 미학적 의미소이다. 그 체감이 눈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눈의 무게란 무엇인가? 그 가벼운 것이 그토록 낮은 소리를 낸다는 것. 다시 말해 눈은 절대로 높이 쌓이지 않고 깊이 쌓인다는 것, 그리고 따뜻하다는 것.

 

* 신현림, 아무 것도 아니었지

아무 것도 아닐 때에, 아니, 아무 것도 아니려고 할 때에 부활이 시작되는 법이다. 아무 것도 아니려고 하는 것은 낡은 생을 죽이고 다른 생을 준비하는 것이니까.

 

* 심재상, 되새김위

한국의 지리를 호랑이도 토끼도 아니라, 낙타에 비유한 사람은 심재상이 처음일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땅에서 신화와 환상을 보지 않고, 역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물론 고난의 역사인데, 또한 그것을 그냥 고난이라고 말하지 않고 권태-양식의 역사라고 지칭한 사람도 심재상이 처음일 것이다. 왜 권태이고 왜 양식인지는 독자들이여 손수 궁리하시라. 그러면 이 낙타-한국 앞에 왜 카메라가 "자꾸만" 번쩍거리는 지도 알게 되리라.

 

* 오규원, 골목과 아이 4

언어와 형상 사이에 간극이 보이지 않는 이 분명한 사건, 설명의 말문이 그냥 개폐되는. 그런데 이 열리고 닫히는 찰나도 엄연한 시간성이다. 다시 말해 시간의 길이이고 두께이다. 이 찰나를 통해 순수 형상은 뜻의 빈 항아리로 움푹 패인다. 이 시에서 두께의 찰나로 기능하는 것은 빗줄기이다. "다름없이 그곳에 있는 것은 빗줄기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허공뿐이다"의 빗줄기는 허공의 기둥이고 허공의 버티칼이다. 기둥이란 사원의 기둥, 즉 사원의 골격이니 그 기둥 때문에 저 그림이 보존되고(생각해보라, 비가 안 왔다면 저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겠는가), 버티칼이란 몰래 엿보는 도구이자 동시에 주체(이게 블라인드와 다른 점이다)이니, 저 빗줄기 때문에 보는 자는 보기만 하며 그가 보는 것은 모든 생이 젖는 광경이다.

 

* 이동백, 보길도에 드러눕다

세 인물이 있다. (), 동박새, . 꽃들은 줄줄이 지고, 동박새는 울며, 나는 그냥 보고만 있다. 이 세 인물을 하나로 잇는 동작이 있는데, 그것은 '보다'라는 동사이다. 그 셋을 가르는 것은 '보다' 이후의 행동이다. 꽃은 보고 지고, 동박새는 보고 울다가 귀를 세우고, 나는 보는 채로 그냥 있다. 꽃의 '보다'는 동일화를 유발하며, 동박새의 '보다'는 행동의 변화를 낳고, 나의 '보다'는 순수 동사이다. 꽃의 '보다'는 감염적이며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동박새의 '보다'는 인접적인데 왜 행동의 변화를 낳는 것일까를 물어야 한다. "남쪽으로 귀를 세"울까? 6행 건너 "모락모락 남쪽으로 떠나는 것을"을 읽었을 때에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무언가가, 아니, "잃어버린 이름"들이 남쪽으로 떠나고 있어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잃어버린 이름이 복수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모양이 "모락모락"이라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 남쪽으로의 움직임은 집단 이주의 움직임이다. 헌데 그 이름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선은 그것이 섬이름들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섬과 섬 이어가다 잃어버린 이름"이란 "섬 이름을 하나하나 이어가다 잊어버렸다"는 뜻을 문자적 의미로 가지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것을 '잃어버린 이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시인은 바다에 자욱히 깔린 섬들의 이어짐에 박탈과 유배의 분위기를 입히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보길도이리라.) 여기까지 오면, 꽃들이 무엇의 비유인지 드러나고, 그 꽃들이 섬으로 변환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꽃들 곧 섬들은 조선조 선비와 같은 유배자("내다본 창"이라는 언술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와 살 곳을 찾아 집단적으로 이주하는 민중들(꽃들, 섬들의 복수성, 그것들의 이동이 암시하는)의 고난이 겹쳐진 특이한 이미지이다. 그걸 보고 동박새는 우는데, 나는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일까? "서리 낀 외길 다시 맞닥뜨릴 때/내다 본 창이 곧 벽임을 절감할까"를 읽으면 나의 '보고만 있음'이 무심히 보는 게 아니라 그 집단 망명 혹은 유배의 길이 결코 안식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데에 그 까닭을 두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자는 안타까이 그저 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상상 속에서 "슬며시 수평선 끌어당겨 입맞추"는 것 뿐. 그래서 지는 꽃이 피는 꽃으로 나비처럼 춤추기를 기원할 뿐. 그러나 그건 읽는 이를 얼마나 애틋하게 하는가.

 

* 이수명, 모래주머니

어떤 양식을 섭취하여도 나는 모래만을 분만한다. 내 잉태의 원천이 모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분만은 사산이다. 그러나 모래는 본래 사막에서 서식하는 생명. 저절로 뜨겁게 달구어져 불모를 다산으로 바꾸려고 무섭게 달려든다. 오래 굶은 뚱보 마르고처럼.

 

* 이승훈, 등받이 없는 의자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300년을 기다리고 다시 300년이 흘러가도 등받이 없는 의자가 되지 못한다. 고독을 선택한 자의 비애는 거기에 있다. 고독은 누구의 접근도 사절하기 때문이다.

 

* 이시영, 석양

모여 사는 게 항상 혈족들만은 아닐지니, 그 까치집이 "발그레 빛나"는 까닭은 그 때문.

 

* 이하석,

이하석의 시는 묘사의 시이며 동시에 이야기 시다. 그는 사물의 단면을 떠서 그것을 체험의 방식으로 풀이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사물에서 생의 깊이를 인식하기 위해서이고, 또 그 인식에 절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 임후성, 이 시간이면

"무념무상의 노동일"은 무엇인가? 무위(無爲)로서 노동하기. 나태(懶怠)를 가장 성실히 실천하기. 임금도 포기하고 성취감도 버리고 파괴의 검은 마음조차 없이 불수의적인 동작을 의지로 하는 것. 왜냐하면 필요한 인생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필요한 인생은 피로한 인생이니까.

 

* 채호기 수련

우리가 인간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 인간의 음험한 용도에 의하여, 그것이 실리적이든 심리적이든, 규정한 타자의 의미를 배제했을 때, 그 타자가 인간이든 사물이든 상관없이, 그 순수 타자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이물감이든 까닭 모를 쾌감이든 다른 존재가 주는, 공기가 나르는, 강렬한 느낌만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그 앞에 선 나는 "돌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고/증발하는 물보다 더 가볍게 떠올"라 그저 지나치게 과잉되거나 지나치게 결핍될 뿐 어떤 의미도, 다시 말해 어떤 통화의 가능성도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의 존재 이유는 거기에서 피어나는 법이니, 원래 그것의 용도였던 의미의 수레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무의미의 현존을 증거하고 지속시킬 유일한 방법론으로서의 언어가 그 존재 이유인 것이다. 상처도 두께도 없는 "건조한 검은 흔적"인 글자가 무수히 되풀이되는 의미 부여의 실패로 무덤을 이룰 때 타자는, 다시 되풀이하지만 그게 사물이든 인간이든, 저의 인간적 의미를 넘어, 그것의 적나라한 나체성을 뚫고, 무한한 상상의 지평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 "꿈이 베일처럼 너의 나체를 가리고 있는/수련이여!//너를 갖기 위해선/글자의 무덤을 파헤쳐야 한다".

 

* 최두석 광릉 숲에서

크낙새의 나무 쪼는 소리가 목탁 소리임을 처음 알았다. 목탁 소리가 나무 쪼는 소리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어리숙한 순정으로/광릉 숲이 광릉 숲으로/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린다"를 읽었을 때 나는 마침내 깨달았던 것이다.

 

* 최하림 가을의 속도

가을에서 낭만을 찾지 말라. 높은 하늘도 살찐 말도 없는 세상이다. 서점은 쓰레기장이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가을도 온 듯하면 벌써 갔다. 이런 세상에서 가을은 가을이 아니라 입동이다. 온갖 생명을 삽시간에 겨울 속으로 삼키면서 스스로 경악하는 아가리이다.

 

* 함성호 고요한 재난

살륙이 풍경이 된 시대. 때로는 광경(spectacle)이고 때로는 주마등(panoroama)인 시대. 이런 시대에 어떤 언어로 말할 것인가? 함성호는 이 살륙-풍경을 내삽하는 글쓰기를 택한다. "어머니, 왜 냉장고 안에 계세요?/천천히 상하기 위해서란다/너는, 오래오래 나를 먹을 거잖니?"가 그 내삽의 가장 깊은 곳이다. 이 시의 언어가 편지와 묘사와 기록과 탐구로 마구 뒤엉켜 있는 것은 그 내삽을 실천하기 위해서 불가피했으리라.

 

* 허만하

그의 시 답지 않게 첫 두 연까지는 추억이 있고 여운이 감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여운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해서 급속도로 폐허의 광풍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격렬한 결핍이 읽는 자의 뼈마디를 들쑤시고 "지금은" 잦아든다. 격렬한 결핍이 다시 결핍되는 것. 결여의 결여가 불안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런데 여기에서 결여의 결여는 그게 아니라 의지이다. 폐허의 잔해들이 새 생을 위해 "일렁이는" 것 말이다.

 

* 황동규 소유언시

깨달음의 시에서 깨우침의 시로! 왠 일인가? 이 영원한 방랑자가 세계 방방 곡곡에서 타인이 아닌 자기를 보고 있다. 새로움이 아닌 과거를 보고 있다. 제 생의 아주 먼 뿌리를 들여바 보고 있다.

 

* 황인숙 조용한 이웃

나도 얇게 저민 햇살을 씹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