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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놀랍게도 김정환이 속내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다. 『순금의 기억』(창작과비평사, 1996)에서 그는 마침내 말한다. 역사는 결코 생의 축적이 아니라고. 역사는 단지 썩은 자궁에서 분만된 고름덩어리라고. 그저 지리멸렬일 뿐이라고. 민중은 헐벗은 만큼 물들지 않았다는 순수의 역설로 군사정권의 압제에 대항해 살아냄의 윤리학을 맞세웠던 초기시나 민주화의 열풍 속에서 민중의 힘찬 진군을 “끈질기고, 길고/거무튀튀”한 기차에 비유한 나중 시들에 익숙했던 독자들은 잠시 아연할 법하다. 그러나, 본래 그는 역사를 믿지 않았다. 초기시의 그가 살아냄의 윤리를 왜 “숨가쁜 진실”,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는 “만남”이라고 말했던가. 그에게 살아냄은 지속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순간의 영역에 속했다. 그의 시는 서사시의 쪼가..
김지하가 해월과 증산에게서 전거를 끌어내며 ‘생명사상’을 제기했을 때, 그것은 순간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촉발시켰다가,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이라는 이론가들의 비판과 함게 차츰 그 광도를 잃어왔다. 하지만 논의가 부정적인 쪽으로 기우는 도중에도 그것은 문학적 실천의 장에 은근하고 깊숙이 스며들어간 모양이다. 많은 작가·시인들이 의식적으로 ‘생명’을 화두로 삼는 경우를 여러번 목격할 수 있다. 이시영의 세 번째 시집 『길은 멀다 친구여』(실천문학사, 1994)의 시편들을 붙들어 매고 있는 주제 단위도 생명이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김지하의 생명과 다르며, 혹은 60년대의 생명주의 문학(박상륭·이세방)의 생명과도 다르다. 그 다름은 그것이 죽음과 맺고 있는 특이한 관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김지하의 생명이 죽..
※ '문심공방 둘'에 실린 글들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씌어진 년도를 유념하고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시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80년대에 절정을 맛보았던 시는 한동안 사소한 음향으로 잦아드는 듯 싶었다. 시는 화살과 같은 것이어서, 핵심에서, 언제나 핵심에서만 놀려고 한다. 그러니, 중심이 와해된 시대에 시가 덩달아 허물어져내리는 것은 예정된 운명같은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시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라지기는 커녕 시는 시방 대량생산 중이다. 그러나, 시에 기생해 성장했던 온갖 문화적 원소들, 감성, 이미지, 리듬, 기지 들이 문자의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가, ‘직접성’의 이름으로 정의할 수 있는 현란한 새 문화 체제들을 이루게 되면서, 시는 오직 문자의 시원만을 재산으로 갖게 되었다. 성(聖)..
이 달에 발표된 이성복과 유병근(劉秉根)의 시들(『문학사상』, 『한국문학』)이 흥미롭다. 이 시들은 한국문학의 오래된 주제 중의 하나인 ‘한(恨)’의 문제에 새롭게 접근한다. 우리에게 ‘한’을 노래한 시들이 유달리 많았다는 것은, 혹은 그런 시들이 애송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 빼앗긴 것, 헤어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잃음과 박탈과 이별이 느닷없고 부당하며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그 잃음·박탈·이별을 야기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장기지속’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 속에 넓고 깊게 스며들어 ‘한’이라는 독특한 심리구조를 형성하였다. 시인들은 끊임없이 그 한을 시로 노래해 해원과 회복을 꿈구어 왔다. 행동가들은 죽음을 불사하며 그것..
우리는 대체로 네 겹의 생각 속에서 살고 있다. 맨 바깥에 감정 그 자체인 생각이 있다. 그 아래엔 논리화된 생각이 있다. 더 깊은 곳엔 반성적 성찰이 움직이면서, 논리가 품고 있는 이기심을 풀어 헤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생각의 피륙을 짠다. 그러나 때로 이 성찰이 크레인의 쇠공처럼 난폭해지는 순간이 있다. “사랑하라, 무조건 사랑하라” 같은 명령은 사랑의 예외적 가치에 근거하고 있으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몸속에서는 광란을 유발할 수도 있다. 이성복 산문의 생각은 그 아래에서 움직인다. 반성적 사유가 절대적 명제로 굳어버리는 걸 경계하고 그것이 본래 질문이라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그것이 스스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독자를 동참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의 움직임을 근본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