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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박이문 선생은 가장 혹독한 삶을 치러낸 세대에 속하는 한국인이다. 그들은 축복 속에서 탄생하지 못했으며 안식할 미래가 손짓하지도 않았다. 식민지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해방과 더불어 공부하는 청년이 되었으니, 바로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전 세대만큼 식민지 제도에 침윤되지 않았다는 점만 달랐을 뿐, 새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어떤 자원도 없는 상태였다. 한반도는 강대국의 관리 하에 들어갔고 곧바로 전쟁에 휘말렸다. 휴전 후 모든 것이 폐허인 상황에서 넝마를 줍듯 희망의 조각들을 힘겹게 줍고 기웠다. 평안은 오직 찬송가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현실은 그냥 비명 그득한 도가니였다. 그 안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겐 시시각각이 사생결단의 순간이었다. 실존주의란 말이 유행한 소이였다는 말을 ..
김수영은 굳은 통념, 상투화된 지식을 경멸하고 경계하였다. 그의 마지막 시 「풀」을 민중의 질긴 생명력에 대한 비유로 보는 견해가 매우 그럴 듯해서 지배적인 통념으로 자리잡은 것은 얼마간은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모든 풀이 질경이는 아닌 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임우기씨의 새로운 해석(「巫 혹은 초월자로서의 시인―김수영의 「풀」을 다시 읽는다」, 『현대문학』, 2008.08)은 무더운 여름의 소나기와 같은 상쾌함을 선사한다. 더욱이 시인의 언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에 이 기발한 해석은 충격적이기조차 하다. 시인은 전 생애를 걸쳐 ‘현대’를 나침반으로 삼았고 ‘현대의 명령’에 의거해 시의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임우기씨는 현대가 아니라 ‘신화’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현대와 신화..
박목월(1917-1978)은 1939년 9월부터 1940년 9월까지 문장(文章)지에 5편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시인이 된다. “북에 소월이 있다면 남에 목월이 있다”는 찬사와 함께 화려한 출발을 한 그의 시적 이력은 그러나 곧 심각한 정치적 장애에 부닥치게 된다. 그가 등단한 시기는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이었고, 따라서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일제는 모든 시인·작가들에게 황민화정책을 옹호하는 작품을 쓸 것을 강요하고 한국의 시인들은 그 요구에 부응하여 친일 어용시인으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침묵을 해야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된다. 박목월은 그 두개의 선택을 모두 거부한다. 그는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문장지를 통해 등단한 조지훈·박두진과 함께 ‘발표를 고려하지 않는’ 시쓰기에..
윤동주 탄생 100년이 되는 해이다. 시인이 1945년 2월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하고 같은 해 8월에 조선이 광복을 맞이한 이후, 윤동주는 한국인들이 가장 아끼는 시인으로 자리잡아 왔다. 연희 전문 동기 강처중과 후배 정병욱이 그의 유품과 유고를 보관하여 후세에 전달함으로써 그를 보듬는 마음이 물질적 상관물을 확보하여 오래 지속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정병욱의 유고 보관의 사연이 극적이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잘 알다시피 윤동주는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내력에 생체 실험을 당했다는 짐작이 얹혀 일제에 의한 민족적 수난의 상징이 되었다. 윤동주의 불운한 생애는 곧바로 한국인의 기구한 운명과 하나로 맞물렸다. 게다가 그의 시들은 한결같이 진솔한 구도의 심정을 담아 자주 독립을 향한..
※ 공지사항에서 언급해 놓았듯이, 오늘부터 『문신공방 ․ 둘』(2018)의 글들을 블로그에 올린다. 서문으로 쓰인 「2007년 가을의 결심」은 이미 블로그에 올려 놓았기 때문에, '카테고리'만 '사막의 글'에서 '문신공방 둘'로 바꾸어 놓았다. 아래 글은 오늘의 출발점이다. 이상은 1934년 7월 24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烏瞰圖)」’ 연작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무슨 개수작이냐’는 독자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보름 만에 중단해야 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이상의 시는 어릴 적 교과서에 빠짐없이 등장해서 누구나 이 얘기를 한 두 어 번 들어봤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일반 독자의 반응과는 다르게 한국의 지식인 독자들은 이상의 시를 소중히 보듬고 아끼고 세상에 퍼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