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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서적 압축을 통해 삶에 대한 이해와 느낌을 순수한 언어의 결정(結晶)으로 빚어낸 것을 시라고 배워 왔다. 시에서 통일된 이미지를 사람들이 기대하는 건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성복의 시가 1980년대 초엽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독자들은 그러한 기대가 철저하게 무너진 것을 보고 경악한다. 거기에 “잘 빚어진 항아리”(Cleanth Brooks)는 없었고, 찢기고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조각났지만 선명했고 알쏭달쏭하지만 강렬한 정서적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복 시의 이 형태적 반란의 배경에는 1980년을 전후해 한국사회의 내부에서 들끓는 모순들의 첨예한 충돌이 놓여 있었다. 한편으로 한국사회는 제 3공화국의 경제근대화 정책이 효과를 얻어 ..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1990)은 이성복의 세번째 시집이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와 『남해 금산』을 거쳐 그가 다다른 이번 시집의 세계는 그의 시적 주제는 이전과 변함이 없는데, 그의 시적 관점은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의 시는 언제나 고통과 평화 사이에 있었다. 시인은 말한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장 더러운 진창과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가장 정결한 나무들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들이 모두 다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함께 있지 않아서 일부러 찾아가야 한이 그것들 사이에 찾아야 할 길이 있고 시간이 있다”(「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시는 언제나 고통과 평화를 함께 찾아가는 시간이며, 길이었다. 그 시간은 그러나 수많은 나날과 수없는 고장을 ..
아마도 누구나 한번 쯤은 어느날 골목길을 무심히 지나다가 아스팔트를 비집고 풀이 돋아난 것을 보았을 때 문득 생명의 경이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동을 “얼랄라/저 여리고/부드러운 것이!”하는 즉각적인 언어로 직역해낼 줄 아는 사람은 소수의 언어마술사들 뿐이리라. 생각해보면 그런 탄성은 누구나 낼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지극히 상투적일 수도 있을 법한데, 그러나 시인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마음의 언어를 날 것 그대로 이끌어냄으로써 놀램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생명의 경이라는 게 저 드높은 곳에 살고 있는 어떤 백익조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아주 친숙한 것임을, 아니, 그렇게 친숙하게 받아들여야만 생명의 경이로움을 스스로 실천할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최석하의 『희귀식물 엄지호』(문학과지성사, 1996)는 첫 시 제목을 그대로 시집 제목으로 쓰고 있다. 제목에 등장하는 엄지호씨는 평범한 공무원인데 “숱한 남의 자식 키워 장가보내는” 선행을 말없이 실천하며, 해마다 벚꽃 만개일을 수첩에 꼬박꼬박 적어두는, 요컨대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다. 이 엄지호씨에게 시인은 ‘희귀식물’이라는 별명을 단다. 헌데, 하필이면 왜 ‘식물’일까? 다시 말해 희귀 인종 엄지호, 천연기념물 엄지호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꼭 식물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있는가? 야릇하게도, 첫 시만을 빼고 다른 시들은 식물적이라기보다 차라리 동물적이다. 시인이 그리는 세상은 날이면 날마다 “전쟁 또는 파괴 그 자체”가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낚시꾼들이 무심코 내던지는 라면봉지들, 깡통들이 바다..
김종철의 『못의 귀향』(시학, 2009)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세계이다. 이야기는 대체로 옛날의 신산한 삶을 애틋이 회상하는 일을 한다. 그 점에서 이야기는 위로와 용서, 거둠과 정돈의 역할을 하는 것, 다시 말해 격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을 넉넉히 받아들이게 하는, 통풍 잘 되는 바구니 같은 것이다. 독특한 것은 그의 이야기가 은밀하게 두 이야기로 겹쳐져 있다는 것이다. ‘삶 이야기’와 ‘말 이야기.’ 그것은 그의 ‘삶 이야기’가 충분히 다스려지지 않는 데서 나온다. 즐겁게, 흔감히 추억하지만 뭔가가 못에 걸린 듯 떨어져 그 스스로 못이 되어 몸의 어느 구석을 슬그머니 찌른다. “못의 귀향”은 ‘못의 귀환’이다. 가령, 식구들이 “밤새 잘 발라 먹은 닭뼈”라든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그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