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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주의의 한 측면- 이시영의 『길은 멀다 친구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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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주의의 한 측면- 이시영의 『길은 멀다 친구여』

비평쟁이 괴리 2024. 2. 21. 03:17

 

김지하가 해월과 증산에게서 전거를 끌어내며 ‘생명사상’을 제기했을 때, 그것은 순간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촉발시켰다가, 비과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이라는 이론가들의 비판과 함게 차츰 그 광도를 잃어왔다. 하지만 논의가 부정적인 쪽으로 기우는 도중에도 그것은 문학적 실천의 장에 은근하고 깊숙이 스며들어간 모양이다. 많은 작가·시인들이 의식적으로 ‘생명’을 화두로 삼는 경우를 여러번 목격할 수 있다.
이시영의 세 번째 시집 길은 멀다 친구여(실천문학사, 1994)의 시편들을 붙들어 매고 있는 주제 단위도 생명이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김지하의 생명과 다르며, 혹은 60년대의 생명주의 문학(박상륭·이세방)의 생명과도 다르다. 그 다름은 그것이 죽음과 맺고 있는 특이한 관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김지하의 생명이 죽임의 세계를 살림의 세계로 바꾸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죽음 자체는 생명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맞짝 개념이며 그 둘은 끊임없이 상호 순환한다. 하나의 삶은 잉태되고 태어나고 자라서 살고 죽고, 죽어 다시 생명체로, 다른 요소로 전환한다. 죽음은 새 삶을 위한 계기일 뿐이며, 삶과 죽음의 부단한 교섭을 통해 생명체들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확장해 나간다. 김지하에게 있어서 생명에 대립되는 개념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활동을 가르고 막고 가두어 부패하게 만드는 일체의 인위적인 억압, 그의 용어를 빌자면, 인위적 죽임, 분별지(分別智), 분할, 물질 등등이다. 생명의 자유로운 운동에 기대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사물, 성공한 인간/실패한 인간 등 인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지배/피지배 질서를 구성하는 부르주아 인간주의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며, 가르고 나누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세계를 개체화·계량화한 부르주아 합리주의에 대한 거부이다.
김지하의 생명주의에는 생명의 ‘활동’에 대한 선언적 강조가 두드러진다. 그 생명의 활동을 그는 “중심적 전체로서 활동하는 무”라고 명명하는데, 그러나 중심과 전체라는 두 어휘 사이의 연결고리가 빈약하기 때문에, 그의 생명은 광활하기는 하나, 분산적이고 기습적이며 미정형이다. 그것은 인간주의·합리주의에 대한 이념적 안티테제로서의 의의가 강한 반면, 생명 세계의 구체적 모습에 대해서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60년대의 생명문학은 생명의 광상(鑛床) 속으로 침닉한다. 그것은 우주 전체를 꿈틀거리고 뒤엉키며 끊임없이 변신하는 거대한 동물로 만드는데, 그 동물은 운동과 변화의 표상으로서의 뱀이다. 그것은 죽음 자체를 똥글똥글하게 또아리를 튼 뱀으로 만든다. 죽음은 삶의 새로운 계기가 아니라, 곧 삶이다. 그 생명문학은 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서구적 합리주의의 체질화에 저항하는 다른 방식의 문화형을 제시한다. 
이시영에게 생명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 세계를 비추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매개물이다. 그것이 매개물이라는 것은 “서울 근교의 낮은 산이 / 얇은 눈 이불을 덮고 / 허름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초겨울」)와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생명의 순수성은 인간적 세계의 더러움을 벗길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세계에 덧씌어지고, 그것에 모종의 작용을 함으로써 드러난다. 생명이 매개물이라면, 시인이 본래 관심을 기울이는 곳은 인간 세계이다. 인간 세계는 인간다운 삶의 훼손된 세계이며,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려는 열망과 행동이 들끓는 세계이다. 그 열망과 행동은 죽음까지도 불사하게 한다. 그럼에도 인간다운 삶은 아득하다. 그러니 “길은 멀다.”
그것은 고통과 아픔을 유발한다. 생명이 그때 죽음/삶의 단절 사이에 틈입한다. 시인은 밤이 지나면 당연히 새벽이 오듯, 죽음이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현상에 기대어 인간세계에서의 죽음을 새롭게 해석한다. 죽음은 고통과 아픔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삶에 대한 믿음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감히 말한다: “지는 꽃은 지게 하라 / 지금 죽어가고 있는 나무는 스스로 죽게 하라 / 꽃이 지고 나무가 죽는 자리에서 / 죽은 땅도 자신을 도려내고 새 흙을 품는다”(「終焉」). 피동적 죽음의 상태는 능동적 죽음-행위로 변모한다. 물론 여전히 “길은 멀다.” 그러나 이제 그 발언에는 탄식이 아니라, 기대와 호소, 그리고 다짐이 있다. 그의 먼 길은 막막한 길이 아니라 아늑한 휴식과 여유의 길이 된다. 그 지연된, 넓혀진 거리를 생명은 빛으로, 냄새로, 소리로 술렁거리며 채운다. 시의 내용이 긴장되고 수축적인 데 비해 형식이 잔잔히 가라앉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시영의 시들은 생명의 부단한 변신과 확산의 복잡한 과정을 탐구하지 않는다. 다만 “생명은 변하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불변의 의미항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생명의 변화는 순환적 변화이고, 자연스러우며, 따라서 언제고 특별한 이유없이도 일어나는 우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 자연의 세계를 시인은 인간세계에 대한 비유와 거울로 사용한다. 그 거울의 비춤을 통해 고통과 좌절의 인간세계는 희원과 믿음의 세계로 변모한다. 이시영의 생명은 자연의 이름으로 제시되지만 무척 인간적이다. ( 『한국일보』 1988.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