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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와 변화 사이- 유병근과 이성복의 시

비평쟁이 괴리 2024. 2. 16. 19:50

이 달에 발표된 이성복과 유병근(劉秉根)의 시들(『문학사상』, 『한국문학』)이 흥미롭다. 이 시들은 한국문학의 오래된 주제 중의 하나인 ‘한(恨)’의 문제에 새롭게 접근한다.
우리에게 ‘한’을 노래한 시들이 유달리 많았다는 것은, 혹은 그런 시들이 애송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 빼앗긴 것, 헤어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잃음과 박탈과 이별이 느닷없고 부당하며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그 잃음·박탈·이별을 야기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장기지속’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 속에 넓고 깊게 스며들어 ‘한’이라는 독특한 심리구조를 형성하였다.
시인들은 끊임없이 그 한을 시로 노래해 해원과 회복을 꿈구어 왔다. 행동가들은 죽음을 불사하며 그것을 위애 온 몸을 던졌다. 그럼에도 회복은 계속 지연되었고, 해원은 아득했던 게 또한 사실이다. 회복과 해원의 실패는 한의 크기를 증폭시켰다.
유병근과 이성복의 시들은 이 자리에서 시작한다. 유병근은 심청을 찾아 나선 심청 아비의 심정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하늘 보면 하늘은 거기 없고 / 나날이 세상은 절벽입니다 / 절벽보다 더 캄캄한 눈앞입니다 / 눈앞에 갇힌 절망입니다”(「沈淸閣碑文 4」) . 점층법이 잘 발휘된 구절이다. 심청아비의 절망은 ‘하늘의 부재’라는 추상적 수준으로부터 ‘세상’과 ‘절벽’을 거쳐 ‘눈앞’의 구체적 절망으로 변용되고 절박해진다. 그 절박함은 ‘나날이’ 같은 부사, 그리고 ‘보다’ 같은 조사에 의해 더 깊어진다. 그러나 이 구절의 묘미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청 아비의 절망이 최고도의 극에 달한 순간 절망에 대한 반성의 계기로 뒤바뀐다는 데에 있다. “눈앞에 갇힌 절망입니다”라는 마지막 시행은 절망의 누적과 심화가 우리를 절망이라는 관념 자체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문제를 예리하게 제기한다. 우리는 절망을, 넓혀 말해 ‘한’을 우리 눈앞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한을 강요한 정황에 대한 이성적 인신과 한의 극복을 위한 논리의 개발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이성복의 「숲」은 그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개진한다. 그는 우리의 한서린 삶을 둘로 분화시킨다. 그 하나가 한의 감정과 몸짓, 즉 고통·절망·원망·아우성·몸부림 등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생생히 살아있는 한 서린 삶 그 자체다. 후자는 바탕이며, 전자는 그 표면이다. 그런데 그 표면의 고통이 되풀이되고 거세어지는 동안, 삶의 바탕, 즉 우리의 살아내는 힘은 지워진다. “숲은 지워지고 고통의 형체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안타깝게 묻는다: “숲이 고통을 떠났습니까 / 고통이 숲을 묻었습니까.”
우리가 고통에 갇혀, 혹은 고통을 강요한 자가 우리를 고통에 가두어 숲을 지울 때, “아우성치던 숲은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그 다음날도, 다음 다음날도 숲은 아무 것도 낳지” 못한다. 그럴 때 숲은 부끄럽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술은 그리워하기에 벌어져 있습니다. 그리움이 끝날 때까지 닫히지 않습니다”(「입술」). 
중요한 것은 ‘그리움’ 자체가 아니라 그리워 하기에 벌어져 있는 입술이다. 그 입술은 물질화된 드리움, 다시 말해 그리움을 새기고 그리움을 북돋고 그리움을 부채질하는 우리의 생생한 삶이다. 그리움(관념)에서 입술(삶)로의 이동이 있을 때 그리움의 주체와 대상은 함께 살아 움직인다: “내 그리움이 크면 당신의 입술이 열리고 당신의 그리움이 크면 내 입술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살아 서로를 그리워 할 때 그리움의 댓아, 회복의 대상은 단순히 과거의 것으로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으로 변화한다: “우리의 입술은 동시에 피고 지는 두 개의 꽃나무 같습니다.”
한은 해원되고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변화가 없는 복원은 없다고 말해야 하리라. 회복을 주장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동시에 그것이 어떠한 새 삶을 낳을 수 있는지늘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이성복과 유병근의 시들은 그 문제를 깊이 환기한다. ( 『한국일보』1988.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