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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 미국은 트럼프가 문제고 한국은 매카시가 문제다. 미국은 벗어나고 있는 중이고 한국은 푹 빠져 있다. 도가닐세, 도가니. ✍ 김현 선생의 말년의 핵심적인 고뇌 중의 하나를 이루는 사제의 권력은 인간 통제 권력으로 변화된다.[1] 는 깨달음은 그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거의 인지되지 못했으나 오늘날 점점 더 심중해지고 있는 현상을 일찍 짚어낸 것으로, 그이의 사색의 내력과 과정을 찬찬히 추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통찰에 접근한 소수의 지식인들이 덧셈의 집합을 이루는 동안에도, 세상은 여전히 똑같은 작동을 되풀이하고 있으며, 이 문제를 바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드물뿐더러,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는 이들의 수도 황차 그렇다는 점에서 절박함의 색조로 내 가슴을 압박한다. 한..
이번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원래 함께 기획되었던 글이 하나 더 있었다. 김현 선생의 『시칠리아의 암소』에 대한 연구로서, 이상길 교수가 「철학의 복화술로서의 문학비평 – 김현의 푸코 연구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불어불문학연구』 가을호(정확히는 123호)에 발표하였다. 이상길 교수의 논문을 읽으며 비로소 선생의 말년 저작들에 대한 온당한 접근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 그대로 ‘기뻤다.’ 그는 김현의 『폭력의 구조 – 르네 지라르 연구』 및 『시칠리아의 암소』(미셸 푸코 연구)에 대한 그동안의 논문들이 1980년대 말부터 불어닥친 편향된 푸코 수용에 의해 왜곡되어 왔다는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으며, 그 편향을 교정하기 위한 모색으로 글을 채우고 있다. 나는 그 글에 즉각 호응..
올해는 김현 선생이 돌아가신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내 요량으로는 이제 김현 선생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가 시작되어야 할 때다.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많은 김현론이 쓰여졌고 나도 얼마간의 글을 발표하였으나, 아직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판단이다. 이른바 ‘본격적인’ 이해는 한국 지식인들의 지성사의 맥락 속에 김현 선생을 위치시킬 때 방향이 잡히게 될 것이다. 특히 유교적 정신 세계의 몰락, 아니 몰락이라기보다는 잠복이라고 해야 하리라, 그 잠복 이후에 개시된 중요한 정신적 흐름들의 길항이 어떻게 변주되어 갔느냐를 포착하는 게 핵심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겸하여, 올해 두 종류의 추모 사업을 치렀다. 하나는 김인환 선생님을 비롯, 홍정선, 김연권, 이철의 교수와 함께 김현 선생의 나날의 일..
황지우의 『나는 너다』 복간본에 대한 해설을 쓰느라 두 달을 다 써버렸다.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나는 그가 1980년대 말에 무슨 고민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 고민이 그가 당연히 맞닥뜨려야 할 정당한 고민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와 고민을 공유한 사람이 당시에 극히 희귀했었다는 건 80년대의 한계를 그대로 지시한다. 나는 1988년의 「민중문학론의 인식구조」에서 그와 동일한 화두를 띄웠으나 그 이후 정반대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하튼 황지우의 시에 대한 얘기는 해설에서 지겨울 정도로 썼으니 그걸로 그치련다. 그 해설을 쓰면서 나를 내내 사로잡았던 다른 생각은 우리 세대가 김현 선생의 영향을 얼마나 깊이 받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기성 문화물의 해체·재구성으로 이루어진 황지..
※ 아래 글은 지난 해 말, ‘목포 김현 문학관’ 개관일에 행사 장소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보완하고 논문 체제를 부여하여, 『비평문학』(한국비평학회) 제 42집(2011.12.31.)에 게재한 것이다. []안에 묶인 숫자는 미주 번호를 가리킨다. 김현 비평에 있어서의 고향의 문화사적 의미 ■ 두 김현과 하나의 김현 김현은 1942년 진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친 후, 목포로 이사해 그곳에서 서울로 유학가기 전까지 9년 가까이 살았다. 홍정선은 「연보: ‘뜨거운 상징’의 생애」에서 목포를 김현의 “제 2의 고향이자 실질적인 고향”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 판단의 근거를 그는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의 기술로 보면 그가 그렇게 판단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우선 김현이 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