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교(정과리)의 문신공방

김현 비평에 있어서의 고향의 문화사적 의미 본문

울림의 글/평론과 연구

김현 비평에 있어서의 고향의 문화사적 의미

비평쟁이 괴리 2012. 1. 12. 23:47

아래 글은 지난 해 말, ‘목포 김현 문학관개관일에 행사 장소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보완하고 논문 체제를 부여하여, 비평문학(한국비평학회) 42(2011.12.31.)에 게재한 것이다. []안에 묶인 숫자는 미주 번호를 가리킨다.

 

 

 

김현 비평에 있어서의 고향의 문화사적 의미

 

 

 

 

 

두 김현과 하나의 김현

 

김현은 1942년 진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친 후, 목포로 이사해 그곳에서 서울로 유학가기 전까지 9년 가까이 살았다. 홍정선은 연보: ‘뜨거운 상징의 생애에서 목포를 김현의 2의 고향이자 실질적인 고향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 판단의 근거를 그는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의 기술로 보면 그가 그렇게 판단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우선 김현이 진도 태생임을 밝힌 후, 진도에 대한 김현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1)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남도의 조그마한 섬이다. 그곳은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나서 이제는 꽤 이름이 알려진 곳이나, 아무튼 그 조그마한 섬에서, 나는 산에 올라가 산나무 열매를 따먹거나, 떼지어 몰려다니며 밭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몰래 맛보거나 [......] 목화꽃을 따먹을 때에, 무나 감자를 몰래 캐먹을 때에, 옥수수를 불에 구워 먹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즐거웠던가. 어른들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무서움까지도 우리에게는 즐거움이었다[1].

 

그리고 목포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렇게 쓴다.

 

(2) 부친이 재정 담당 장로로 재직하게 되는 목포 중앙교회(中央敎會)에 부모님과 함께 열심히 다니다. 국민학교 2~3 학년 시절의 그는 당시의 생활기록부에 의하면 억센 장난을 좋아한 학생으로 기록되고, 당시의 교회 사람들에겐 싸움하면 김광남으로 기억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을 잘 외우는 아이로, 만화책을 열심히 읽는 아이로 기억되다. 53 년경부터 무정』 『임꺽정등의 책을 함부로 읽기 시작함으로써 `맥락의 독서가'로서의 자질을 키우다[2].

 

두 장소에 대한 기술의 차이는 무엇인가? 진도에서의 김현은 자연 속의 존재라면, 목포에서의 김현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즉 목포로 이사 오면서 소년 김현은 사회로 들어가는 입사식을 치렀다는 것이다.

홍정선의 이 기술을 반박할 자료는 많지 않다. 김현은 유소년 시절에 대한 기억을 풍부히 남기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소량의 추억이 연보를 그렇게 쓸 수밖에 없게 했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다음 두 가지 유보 사항은 남겨야 할 것 같다. 우선, 실제의 변모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길다란 중첩적 기간을 통해 서서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진도에서도 그는 얼마간의 사회화의 훈련을 쌓고 있었고, 또한 목포로 이사 와서도 자연인으로서의 면모가 남아 있었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찰나간에 야만인에서 문명인으로 돌변했다고, 진도의 프라이디는 목포에서 로빈슨이 되었다고 말해야 할 궁지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홍정선의 기술에서도 그러한 중첩적 기간에 대한 암시를 읽을 수 있다. 왜 하필이면 연보의 필자는 소년 김현이 억센 장난을 좋아하고 싸움하면 김광남이라는 기억을 특별히 적어두는 수고를 들였겠는가? 목포에서의 초등학생 김현은 아직 얌전한 모범생이 되기는 어려웠는데, 그것은 분명 진도에서의 자연성의 흔적을 그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유보 사항은, 진도와 목포 사이의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이어주는 끈이 은밀히 진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시 연보의 필자가 직관적으로 간취해 인용하고 있는 두 대목을 비교해 보자.

 

(3) 지금도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면, 옻나무나 발목까지 빠지던 펄의 감촉이 맨 처음 되살아나오고, 가도가도 끝이 없던 여름날의 황톳길의 더위와 모깃불의 매캐한 냄새가 나를 가득 채운다[3].(‘진도에 대한 추억)

 

(4) 그때의 내 고향에는, 유식한 피난민들이, 할 장사가 없었기 때문에 벌여놓은 헌 책방들이 숱하게 많이 있었고, 나는 깍듯한 서울말을 쓰며,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다니는, 이름도 계집애처럼 부용이라고 불리는 한 아이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 헌 책방의 소설책들을 거의 다 읽어냈다. 읽었다고는 하지만, 지루하고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는 지문地文은 성큼성큼 뛰어넘고, 멋진 대화같이 느껴진 것만을 읽어가는 괴상한 독법으로 읽은 것이었다[4].(‘목포에 대한 추억)

 

이 두 대목에서 독자는 두 김현과 하나의 김현을 동시에 읽는다. 두 김현은, ‘산과 펄을 뛰어다니는 어린이책을 읽는 소년이라는 아주 다른 두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두 김현은, 똑같이 뛰어다니고있다. ‘진도의 소년은 주위의 모든 자연을 제 몸 안으로 옮기며 동시에 그 자연 속으로 전진하느라고 무척 바쁘다. ‘목포의 소년은 어떠한가? 그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학생이 아니라 어떤 아이 뒤를 쫒아다니면서책을 읽어냈다. 그 독법 또한 뜀박질과 같은 것이었다. “지루하고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는 지문地文은 성큼성큼 뛰어넘고, 멋진 대화같이 느껴진 것만을 읽어가는 괴상한 독법으로 읽은 것이었다.” 이 괴상한 독법은 훗날 그의 그 기묘한 속독으로 발전한다. 그는 외국어 문헌을 읽을 때 거의 사전을 찾지 않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는 맥락에 맞추어 그 뜻을 헤아렸다. 이러한 독법이 어떤 속도를 그에게 부여했을지는, 사전에 새까맣게 때를 묻히는 단어 좀벌레의 신세를 벗어나보지 못한 연구실의 앉은뱅이들은 능히 실감하고도 남으리라. 또한 아마도 그에 대해 맥락의 독서를 체질적으로 타고난 비평가[5]라는 감탄을 발성케 한, 맥락을 꿰고 읽는 통찰력, 역시 그러한 자발적 속독 훈련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성인이 된 비평가 김현이 언제나 매우 빠른 속도로 빠짐없이 읽되 전체로 읽었다는 것은 주변의 친구들에 의해 빈번히 증언된 그의 모습이었다.

 

먹는 욕망과 책 읽기

 

이 태도의 동일성이 그런데 어떻게 나왔을까? 어쩌면 그것은 그가 진도에서 익힌 자연인의 활력을 체질적 에너지로 전환시켰다는 데서 오는 것일까? 다시 말해 산천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그의 활동성이 그에게 유전인자로 박혔던 것일까? 그래서 목포에서의 사회화 과정 속에서도 그의 자연성은 내부에서 영구동력적으로 작동하여, 한편으론 사회적인 것과 갈등을 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론 그의 사회적 면모를 특이하게 변형시켜 나갔던 것일까?

이런 짐작은 비교적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독자는 앞서의 인용들에서 이 짐작을 뒷받침할 몇 개의 표지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김현이 진도를 회상할 때, 먼저 그곳이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난곳이라는 점을 상기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그의 문학’(예술)의 원천이 진도에 있음을 은근히 암시한다. 여기에서 예술가란 직접적으로는 남종화의 대가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데, 김현의 미술적 안목이 이들의 그림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그 자신이 밝힌 바이다.

 

(5) 일찍 돌아가신 목제와 선친이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선친은 그림에 일찍 눈이 떴다. 그때의 그림이란, 소치·미산·의제·남농 등의 전통적인 산수화를 말한다. [......] 선친이 모은 그림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그림이란 동양화,  중에서도 남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고등학교  서울에 처음 와서, 서양화와 북화를 만났을 때의 이화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중학교 때까지의 나의 의식 속에서, 예술은 문학과 전통 산수를 뜻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음악이 제외되어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교회의 합창만을 뜻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음악에 미쳐 전축과  얘기만을 하는 문우들을 봤을 때의 위화감은, 서양화나 북화를 봤을 때의 위화감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6].

 

이 대목은, 예술적 안목은 어린 시절에 트인 것일수록 속 깊이 배서, 이후에 배운 것들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암시를 등불삼아 따라가면, 그가 진도를 회상하며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난곳임을 앞자리에 상기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예술의 원천이 진도에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망이 그의 내부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둘째, 진도에서 산천을 뛰어다닐 때나 목포에서 책을 읽을 때 모두 먹는 것에 대한 얘기가 곁들여져 나온다는 것이다. 진도의 산천을 뛰어다닐 때, 그는 길가의 꽃을 따먹고, 밭에서 서리를 하였다(인용문 1). 다른 한편, 목포의 노점 책방을 쏘다닌 다음(인용문 4), 거기에서 산 책을 집에 돌아 와 읽는 모습을 그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6) 겨울밤에, 가슴에 베개를 괴고, 해남 물고구마를 눌어붙도록 쪄가지고 먹어대며, 이형식에서 오유경에게로, 허숭에서 임꺽정에게로, 그리고 오필리아에서 파우스트로 정신없이 뛰어다닌다[7].

 

그러니까, 그는 집안에서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뛸 때는 어김없이 먹을 것이 따라 다닌다.

셋째, 진도에서와 달리, 목포에서의 뛰어 다님은 어떤 제재에 부딪쳤다는 것. 실로 목포에 대한 회상은, 진도에 대한 회상과는 완벽하게 달리, 자신의 추락에서부터 시작한다.

 

(7) 맨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국민학교 일학년 때의 내 짝이었던 고깃집 아이의 혈색 좋은 두툼한 얼굴이고, 그 얼굴에 겹쳐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들과 싸우다가 내가 머리를 거꾸로 하여 처박혔던, 내 집 앞의 개울이다. 그 개울이 끝이 남직한 저 먼 곳에서 춘원의 무정을 읽다가 어머니에게 들켜,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얘기책만 읽고 있다는 꾸지람을 듣고 훌쩍거리는, 어깨가 좁고 얼굴이 창백한 소년이 떠오른다.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다[8].

 

독자는 국민학교 일학년 때의라는 그 때가 진도에서의 1학기인지, 목포에서의 2학기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회상이 곧바로, “내 집 앞의 개울에 처박혔던 회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방금 본 바와 같다. 내 집은 목포의 집이라고 판단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 집 앞의 개울과 꾸지람 듣는 장소 사이에 연속성을 둔 상태에서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은 무의식적으로 1학년과 5학년을 분명히 가르고 있는 것이다. 이 가름에 주목한다면, ‘고깃집 아이처박힌 얼굴사이에는 어떤 대립적 관계에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짐작까지 갔을 때, “고깃집 아이아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고기때문에 등장했다는 것을, 정신분석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금방 눈치챌 수 있다. , 이 대목은 먹을 것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해 제재(制裁)가 가해진 장면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회상들에서 이 은유의 실제를 확인할 수 있다. 곧바로 소설책을 읽다가 어머니에게 들켜” “꾸지람을 듣는 소년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제재는 이어서 다시 확인된다. 목포의 노점 책방을, “오필리아에서 파우스트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8) 그러다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들켜 호되게 꾸지람을 듣는다. 그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소설책을 읽어서는 무엇하려는 것이냐는 푸념이 어머니의 주된 공연 프로그램이었다[9].

 

독자는 이 제재가 없었던 김현의 한때를 기억한다. 위의 꾸지람을 듣던 기억을 쓴 같은 책, 한국문학의 위상의 바로 다음 장에서, 그는 어머니의 푸념에 대답을 하면서, 이렇게 쓴다.

 

(9)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으므로, 그 원초적 느낌의 단계는 감각적 쾌락을 동반한다. 그 쾌락은 반성을 통해 인간의 총체적 파악에 이른다. 이 대목을 쓰려니까 갑자기 내 의식은 어렸을 때의 어머니의 음성으로 향한다. 겨울밤엔 고구마나 감, 그것이 아니면 하다못해 동치미라도 먹을거리로 내놓으시고, 나직한 목소리로 아벨과 카인의 얘기를,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수절 과부의 얘기를, 도적질하다가 벌을 받은 그녀의 친지 중의 한 사람 얘기를 어머니는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하신다. 그때에 내가 느낀 공포와 아픔, 고통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그 아픔이나 고통 밑에 있는,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주는 쾌감을 내가 얼마나 즐겨했던가[10]

이 제재가 없던 때의 이야기 공간, 거기가 꼭 실제의 진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진도에 그대로 해당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이런 대목들에 주목하여, ‘김현 문학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놓은 적이 있다.

 

) 그의 문학은 말이 아니라, 글로부터 시작되었다;

) 그는, 그러나, 그의 글 속에서 말을 꿈꾼다[11].

 

이제 여기에 다음과 같은 말들을 부연할 수 있을 것이다.

 

) 그의 의 지리적 공간은 진도이고, 그의 의 지리적 공간은 목포이다.

) 그의 진도와 직접 상응하는 데 비해, 그의 목포와 길항한다.

) 그 까닭은 그의 의 반물질이 아니라, ‘의 확장, 즉 말의 외연이라는 의미로서의 바깥이기 때문이다[12]. 반면, ‘목포진도의 바깥이되, ‘진도의 반공간(사회성)이려 한다.

) ‘의 바깥으로서의 진도의 바깥으로서의 목포와 경쟁한다. ‘을 확장하려 하고, ‘목포진도를 대체하려고 한다.

) 이 갈등 때문에, ‘의 연장이 되려고 하는 의지 하에, ‘의 감각적 쾌락과 목포의 사회성 사이의 대립을 이해하고, 쾌락과 사회성을 동시에 반성하고 탐닉하는 자리가 된다.

 

 

쾌락과 신성한 것 사이에 놓인 침묵

 

소년 김현에게 목포는 사회이되, 화해의 공동체가 아니라, 규범과 규칙으로 이루어진 제도로서 다가왔다. 그 보다 더 어린 시절에 그가 체험했던 행복한 말의 공간은 규율들의 집합체로서의 사회 속으로 이동하면서, 곧바로 그것과 갈등한다. 그 갈등의 원인이자 결과가, ‘이고 이다.

이 율법과 규칙으로서의 사회성은 실은 의 공간과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역시 한국문학의 위상의 다섯 번 째 장에 이르러, 김현은 그에 대한 단서를 슬그머니 흘린다.

 

(10) 시골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뱃속까지 뜨거워지도록 가차없이 내리퍼붓는 여름날의 땡볕과 저녁 어스름이 내릴 무렵, 평상을 내놓거나 멍석을 펴놓고, 모기를 쫓기 위해서 쑥불을 피우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된장 종지며 반찬 그릇을 어림잡아 찾아다니며 저녁을 먹은 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 얘기의 재미를 거의 모를 것이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옛날 얘기의 대부분은 성경 얘기였다.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얘기에서부터, 구약성서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를 나는 처음에 얘기로서 받아들였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그것들은 세계의 원초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얘기로 생각되었다. 성경을 하나의 역사적인 저술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그럴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난 뒤에도, 그것은 글로 씌어진 것 이상의 의미를 내 속에서 갖고 있었다. 그것은 성스러운 것이었고, 다시 말해 세속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년 주일 학교에서 공포와 경외감을 가지고 성서를 마치 교과서를 배우듯 배우면서, 그와 비슷한 시기에 나는 소위 세속적인 얘기를 적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저 질투심 많고 잔인한 신의 이야기와는 다른 여러 얘기들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것들을 나는 경외감이나 공포심을 갖고 읽지 않았다. 나는 그것들을 호기심과 감각적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읽었다. 그리고 상당한 시일이 흐른 뒤에, 나는 사람들이 내가 읽은 것을 시니, 소설이니, 수필이니 하는 따위의 문학적 쟝르로 구분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가 문학이라고 흔히 부르는 것 속에는 성경이나, 고등학교 시절에 그토록 탐독한 뜻으로 본 한국 역사나 김교신金敎臣의 수필집 같은 것은 끼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3].

 

소년 김현이 어린 시절에 부모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대목이다. 빠짐없이 먹을 것이 등장한 다음,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주목할 사항이 있다. 우선,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성경 얘기라고 명시되었다는 것이다[14]. 그런데 독자는 어머니가 들려주던 얘기에도 성경 얘기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인용문 9). 그러나 어머니가 들려주는 성경 얘기는 이야기 일반 속의 한 항목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반면, 아버지의 얘기에는 오히려 다른 이야기들이 성경 얘기속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성경 얘기든 그냥 얘기, 그것들은 소년 김현에게 처음 이야기 일반으로 수용된다는 사실(“구약성서[......]의 역사를 나는 처음에 얘기로서 받아들였다.”) 에 근거한다면, 그 차이는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른 김현은 그 성경 얘기의 이야기성을 아주 자연스러운 듯, 무심하게 기술해 나간다:

 

그것은 글로 씌어진 것 이상의 의미를 내 속에서 갖고 있었다. 그것은 성스러운 것이었고, 다시 말해 세속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논리적인 삐걱거림이 있다. 어떤 위장, 혹은 침묵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원래 이야기가 감각적 쾌락을 동반했다고 추억했었기 때문이다(특히 인용문 9).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김현의 추억을 되짚어온 길에 적합한 것이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는 김현은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성스러운 것”, “세속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최소한 양보 접속사 구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양보 접속사 구문을 넣어서 읽으면 추억의 길은 다음과 같이 모습을 드러낸다.

 

() 아버지의 성경 얘기는 어머니의 이야기와 달랐다.

() 어머니의 이야기가 감각적 쾌락을 동반했다면, ‘그러나아버지의 성경 얘기는 무언가 성스러운것을 담고 있었다.

() 아버지의 성경 얘기는 내게 공포감, 경외감을 불러 일으켰다.

() 이후, 나는 아버지의 성경 얘기를 교과서를 배우듯, 즉 해야 할 공부로서 읽었다. 그리고 그런 공부책들은 성경얘기를 넘어, 역사서, 말씀집(김교신의 수필집) 등으로 확대되었다.

() 반면, 나는 다른 책들을 발견했는데, 그 책들은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감각적 쾌락을 동반하였고, 경외심, 공포감을 주지 않았다.

() 나는 감각적 쾌락을 동반하는 책들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이 대목은 김현에게 있어서 책의 분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 분화된 양쪽의 책 중 김현의 정서적 이끌림이 어디에 있는가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독자가 전체 맥락을 이해하고 난 후의 일이다. 김현은 그런 분명한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고 슬그머니 얼버무림으로써 저 신성한 것감각적 쾌락을 동반하는 것사이의 차이를 은폐하고, ‘신성한 것이 주는 공포감을 희석시킨다.

왜 그랬을까? 말 그대로 그것의 발설 자체가 공포를 주기 때문이었을까? 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문학적 명제는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명제에 비추어 보면, 성경 말씀은 문학의 정반대에 위치한다. 성경의 이야기는 초자아에서 오고, 문학의 이야기는 이드거시기에서 오는 것이다. 일상적 언어 공간에서는 성경 말씀이 스스럼없이 발설되는 반면 반대쪽의 이야기는 거시기’, ‘그것이라는 포괄적 지시대명사로나 넌지시 가리켜질 뿐이다. 일상적 언어 공간은 언제나 ()’을 지향하고, 그 공간 안의 주체는 의 실행자임을 자처하기 때문이다[15]. 그에 반대해서 김현은 거시기문학으로 재명명하는 효과를 이용하여 그것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 자유로움이 율법을 위반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왜냐하면 그 자유로움은 율법의 눈이 도슬러 살피면 무척 위험스러운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율법의 주인이 어느날, ‘호르헤Jorge’[16](장미의 이름)처럼 거기에 독약을 처방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에게 사회화는 동시에 기독교화였다. 때문에 그의 문학성경의 저편을 지향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의 뿌리를 부정하는 결과마저 초래할 수도 있었다[17]. 김현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에 싸움꾼이었는지 모르겠으나[18], 그 이후 그는 공부 잘 하는 모범생으로 성장하였다. 그에게 기독교는, ‘공포는 모호하게 은폐된 채로, ‘신성함의 이름으로 그를 이끄는 빛이 되었다. 그 빛은 그리고 단순히 가족 안에만, 혹은 성경 속에서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그것은 하나의 사회였다. 교회가 그 사회의 실제적인 이름이었다. 그는 아주 독실한 교회의 신자였다. 그 빛이 지상에 널리 퍼진 가두리에 그는 한 사람의 정신적 아버지도 두고 있었다.

 

(11) 이국선 목사의 죽음은 또 하나의 아버지의 죽음이다. 그 아버지는 청교도적 기독교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는 52 1 월부터 63 6 월까지 11 5 개월을 목포 중앙교회에서 사목했다. 나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떡과 김치를 목사관에 가져가던 날 처음으로 그와 그의 식구들을 봤다. 깨끗하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그는 맨발로 다니고 잠방이를 입고 있는 내 눈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고, 깨끗한 검은 예복을 입은 이방인이었다. 그 뒤로 나는 목사관을 제 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집에서 가까웠으며, 고전스러운 돌집이 마음에 들어서였으며, 목사관의 이방인적인 청결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목사관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거기에는 또한 나보다 어린 계집아이들도 있었다. 국민학교 5, 6 학년생이었던 나는 아마도 성을 알기 시작하였던 모양이고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흥미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 성은 신성성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그의 설교를 매주 공들여 노트하였으며, 그것은 상당한 분량에 이르렀다. 나는 지금도 그때 내가 쓰던 손바닥만한 노트를 기억하고 있다. 그의 전언의 상당수를 나는 이제 기억할 수 없지만, 타불라 라사를 설명하던 그의 목소리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는 외침보다도, 나에게는 그 타불라 라사가 훨씬 더 무서웠다. 나는 틈만 나면 내 손과 얼굴을 씻었으며, 그것은 거의 병적으로 되어갔다. 성은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바꿔 나에게 나타났다. 야뇨증이 시작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리고 57 년에 나는 서울로 올라왔으며, 그가 목포 중앙교회를 떠난 뒤에도 인천으로 그를 찾아가 뵙곤 하였다. 인천에서 뵌 그는 도시 산업 선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에야 그의 염결성·깨끗함이 청빈함·정직함·진지함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의 가난의 엄청난 도덕적 무게에 짓눌리곤 하였다. 나도 그와 같이 되리라. 그러나 그는 내가 대학을 마친 뒤 신학 대학에 가보겠다는 내 생각을 내보였을 때, 그것을 극력 말렸다. 너같이 편하게 자란 아이는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곱게 대학원으로 진학했고, 그는 그의 가파른 길을 그대로 걸어갔다. 그는 계속해서 나에게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아버지이며 스승이었다. 그 스승의 뒤를 이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고재식이다. 묘소에서 그는 거의 실신할 듯하였다. 아버지와 스승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좋은 제자를 두었다[19]. (1986104일의 일기)

 

일기는 김현이 존경과 불편함이라는 양가적인 마음을 내내 품으면서 이국선 목사를 따랐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기라서 그럴 수 있었겠지만, 아니 출판을 염두에 둔 일기라는 걸 감안하면 트럭의 덜컹거림 같은 게 가슴을 스칠 만큼 과감하게, 그는 이국선 목사의 청빈함·염결성이 그에게 가한 정신적 억압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는 신체적 차원에서 현상한 결벽증과 야뇨증에 시달렸으며, 이국선 목사의 가난의 도덕적 무게에 짓눌렸다. 하지만 그 솔직함을 빙자하여 그가 대신 그는 무언가 돌려 말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는 눈치 챌 수 있다. 그는 신학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이국선 목사가 말렸다고 적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이 이 목사의 길을 따랐음을 확인하고는,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내리닫이로 이어 썼다. 그의 이 신속한 인정 절차에는, 체념보다는 결심이 더 느껴진다. 그는 그가 가지 않은 길을, 그가 가지 못할 길이라는 규정을 통해 서둘러 빗장을 걸고 있는 건 아닌가? 게다가 그는 자신 대신 자신의 친구를 이 목사의 적자로 내새움으로써,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책임감마저 면한다. 이 목사의 적자가 아니라는 말은, 그가 정신적 아버지를 승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음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렇게 본다면 그가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는 정신적 억압은 그 억압을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그의 은밀한 저항에 대한 암시로 기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렇게 해서, 문학에 대한 그의 선택이 야기했을 수도 있는 온갖 종류의 혼란을 차단했을 지도 모른다. 독자는 방금 혼란의 원인으로 문학 하는 행위의 근본적인 자유성, 즉 모든 율법과 규율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충동에 두었지만, 사실 김현에게 있어서, 그것은 태생적인 것, 즉 진도와 목포의 대립이자, 자연성과 사회성의 대립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태생적인 만큼, 그 대립은 해소 불가능한 것으로 비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해소불가능을 선험적으로 받아들인 지표적 사건들이, 분열의 초창기에 일어난, 싸움, 꾸지람 등이었을 것이다. 그 해소불가능한 것들 사이에 그는 침묵을 개입시킴으로써, 예정된 혼란을 유예했던 것일까?

 

먹기의 욕망과 성의 욕망

 

그러나 그것 만이었다면, 그의 문학적 행로가 그렇게 썩 진취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예정된 혼란의 유예는 실제로는 갈등의 유보로 나타나게 마련이고, 갈등의 유보란 쌍방의 자기억압을 대가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억압은 그의 문학론 자체에 착종을 일으키고 그의 문학적 감수성에 파탄을 야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론의 핵심은 억압하지 않는다라는 것인데, 그것은 타협의 여지가 거의 없는 매우 근본적인radical 태도이기 때문이다.

억압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보존하기 위하여, 그 명제 앞에 침묵을 개입시킨다? 그런 그 명제는 모든 율법의 철폐를 요구하는 데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그것들에 대한 의혹과 반성을 촉구한다. 그에 대해서는 명제의 창안자가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

 

(12)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것을 향유하는 자에게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소위 감동이라는 말로 우리가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심리적 반응이다[20].

 

따라서 그 침묵이 말 그대로, 순수한 유보, 다시 말해 억압하지 않음의 유예일 수는 없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억압하지 않음의 실행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가 공포심과 경외심을 느낀 저 신성한책의 세계에 특별한 작용을 하는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논리 속에 슬그머니 개입시킨 침묵이 진짜 특정한 알고리즘으로 작동하는 교묘한 대화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알고리즘을 찾을 수 있다면 말이다.

독자는 문득 이국선 목사를 회상하는 그의 일기에서 그 알고리즘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저 일기에서도 무언가 어색한 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정신적 아버지가 머무르던 목사관에 갈 때 오로지 경외감만을 갖고 가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읽어 보자.

 

목사관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거기에는 또한 나보다 어린 계집아이들도 있었다. 국민학교 5, 6 학년생이었던 나는 아마도 성을 알기 시작하였던 모양이고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흥미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 성은 신성성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나타났던 것이다. (인용문 11의 부분)

 

목사관을 가는 그의 마음에는 경외감 뿐만 아니라 성적 호기심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느닷없는 진술이다. 일차적으로 이러한 고백은, 교회에 나가는 이유는 주님께 기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성 교제를 위해서라는 항간의 잡담이나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오래된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본문이 가리키다시피, 거기에는 보다대신이라는 선택의 문제가 놓여 있지 않다. 오히려 신성성은 하나로 동일시되고 있다. 그 동일시 속에서 그는 목사관을 열심히 드나들고 이목사의 말씀을 받아 적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성적인 것신성한 것은 상극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독자는 앞에서 이 일기의 후반부가 매우 조급한 서두름의 기운에 휘말려 있었던 걸 보았다. 그 서두름은 독자의 해석으로는 이 목사의 길을 따르지 않은 데 대한 알리바이를 조성 하고자 한 욕망이 시킨 일이었다. 그런데 그 덕분에 그는 자신이 문학을 선택한 데 대해 보다 분명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그것 뿐일까?라고 독자는 방금 질문하였다. 그 질문의 연장선 위에서 그의 서두름이 일기의 후반부뿐만 아니라 일기의 전체를 관류하는 전체적인 분위기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갖는다. 독자는 여기에서 프로이트의 다음 구절을 떠올린다.

 

바그너 박사가 자신에 대해 보고한 사례: 옛날 강의 노트를 다시 읽다가 나는 교수의 말을 따라가느라고 급히 쓴 탓에 오자lapsus calami를 낸 것을 발견했다. ‘상피Epithel’라고 써야 하는데 ‘Edithel’이라고 쓴 것이다. 이 단어의 첫 번째 음절에 주목할 우, 그것은 어떤 소녀의 이름의 약칭이 된다. 이는 회고적 분석을 통해 간단히 알 수가 있다. 그 실수를 하던 때에 나는 그 이름을 가진 소녀와 아주 피상적인 관계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이 친한 사이가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나의 잘못 쓰기는 나의 무의식적 이끌림의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그 당시는 내가 에디트와 나 사이가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때였는데 말이다. 선택된 약칭의 형태는 동시에 나의 무의식적 경사에 동반되었던 감정들의 특징을 암시하고 있다.[21]

 

독자는 바그너 박사의 경우와 비슷한 일이, 김현이 일기를 통해 추억하는 사건에서도 일어났다고 짐작할 수 있다. 즉 성과 신성성의 글자들 사이에 다급한 마음의 결과로 우연한 일치가 일어났고, 즉 성()과 성()이 혼동되었고, 그것은 소년 김현의 무의식적 욕망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 착오로 인한 동일시를 통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경외롭고 공포스러운 것이 육체적 흥분을 유발하게 되었는가? 그런 해석은 불가능하다. 그건 신성의 위상 자체를 무너뜨리고 따라서 신성이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를 말소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다른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단서는 일기의 본문에도 있고, 바로 그 일기 직후 씌어진 며칠 후의 일기에도 있다. 본문 안에 있는 단서는, 그가 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방식이다. 소년 김현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 뒤로 나는 목사관을 제 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집에서 가까웠으며, 고전스러운 돌집이 마음에 들어서였으며, 목사관의 이방인적인 청결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목사관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거기에는 또한 나보다 어린 계집아이들도 있었다. 국민학교 5, 6 학년생이었던 나는 아마도 성을 알기 시작하였던 모양이고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흥미를 느꼈던 모양이다.(인용문 11의 부분)

 

성에 대한 호기심은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것이다. 어른 김현은 훗날의 추억 속에서 막 눈에 뜬 성 때문에 이방인(의 소녀들)에게 흥미를 느낀 모양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거꾸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이 이성에 대한 흥미를 유발했다고. 왜냐하면, 바로 앞에서 그가 목사관을 자주 드나든 이유 중의 하나로, “목사관의 이방인적인 청결함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 그가 관심을 가진 성은, 바로 이방인의 성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단서는 위의 일기 이틀 후에 씌어진 일기이다.

 

(13) 어제 저녁에 오랜만에 강강수월래를 보았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 그것은 찬란한 축제의 이미지였다. 보름달이 뜨면, 거리거리가 조금씩 달아오르면서 북교국민학교로 가는 인파들이 집 앞을 가득 메웠다. 그 인파들에 휩싸여 학교까지 가보면, 운동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강강수월래를 추고 있었다. 그 빛나는 돎 속에 내가 모르는 어떤 성적인 것이 숨겨져 있었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애달아하였다[22].(106일의 일기)

 

목포에서 그는 강강수월래를 보았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유년은 목포의 유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타당하다. 두 번째 고향에서 목격한 찬란한 축제”, 그것이 강강수월래였다. 그런데 그 강강수월래에 대해 소년 김현은 빛나는 돎 속에 내가 모르는 어떤 성적인 것이 숨겨져 있다고 느꼈고,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애달아하였다.” 여기에서도 성적인 것이 나오고, 그 성적인 것은 낯선 것으로 이어진다.

이 알고리즘은 그러니까 특이하면서도 간단한 것이다.

 

() ()과 성()의 음운상의 일치에 근거한 착오를 통해 하나로 동일시한다.

() 이 동일시를 통해서, 신성함에서 경외스러움과 공포스러움의 음울한 무게가 덜어진다.

() 가벼워진 신성함의 성격은 낯선 것이다.

() 그 낯선 것은 소년 김현이 그것이 무엇이 몰라 애달아 할것이 된다.

 

이 알고리즘은 타당한 것일까. 이것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그의 원초적 욕망과 비교하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원초적 욕망이란, 바로 진도로 상징되는 욕망, 즉 먹을 것을 동반한, 감각적 쾌락을 낳은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가리킨다. 그 욕망과 이 알고리즘을 대비시키면 그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 진도의 공간: 먹기의 욕망, 동일화에 대한 욕망, 감각적 쾌락, 어머니로부터 오는 쾌락.

() 목포의 공간: 성에 대한 욕망, 낯선 것에 대한 욕망, 발견적 쾌락, 아버지로부터 오는 기쁨.

 

진도의 산천을 뛰어다니거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이 먹을 것을 동반했다는 것은, 그 즐거움이 동일화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먹는 것은 타자를 주체의 몸속에 집어넣고 주체의 기관을 통해 소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성적인 것은, 김현에게 있어서, 이타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타났다. 하나의 증거를 더 들어보자.

 

(14) 사춘기 때에, 나는 나와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는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마음속으로 간음하였다. 그녀들은 그때의 나에게는 단순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을 이해하게 되자마자, 여자들은 먹히기를 기다리는 고깃덩어리이기를 그치고, 장미꽃 핀 화원을 드나드는 천사들이 되었다. 문학은 그 고깃덩어리와 천사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매개체이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23].

 

이 대목의 원색적인 묘사 때문에 얼굴이 벌개지는 건 그리 좋은 독법은 아닌 듯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일괄적으로 성적 욕망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둘로 나뉘고 있다는 것이다. 앞의 성적 충동은 먹는 욕망과 직결된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김현은 고깃덩어리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반면, 뒤의 성적 호기심은 존재 상승에 대한 욕망(천사는 나와 존재 차원이 다른 존재이다), 즉 달라짐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목포에서 시작된 그의 사회화는 매우 심중한 정신적 억압을 소년 김현에게 가했다. 그러나 소년 김현은 그 억압에 저항해 진도의 자연성으로 퇴행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고, 그는 사회성 자체도 쾌락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찾아내는 길을 모색했는데, 그것은 바로 신성성과 성적인 것을 혼동시켜, 신성성의 무게를 가볍게 하고, 신성성을 낯선 것’(‘의 호기심 또는 탐구의 대상)으로 바꾸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니 독자의 옛 글은 조금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옛 글에서 독자는 이렇게 썼다.

 

김현은 글을 통해 말을 꿈꾼다.

 

아니다.

 

그는 글로써 말을 꿈꾸며, 동시에 말을 꿈꿈으로써 글의 세계를 펼친다

 

그가 사회화 과정에서 쾌락을 발견했다는 것은 글의 차원에서 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추구를 통해서 이룬 것이 쾌락 그 자체가 아니라 반성적 사유라는 것을 가리킨다. 때문에 그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짓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읽혀진다.

 

(15) 이 땅이 고통스런 천국이라면, 그것은 반성하는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내가 형제간에 화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내가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아버님께서 다시 회초리를 들어 나를 때리시고, 그 분의 집에서 나를 내쫒으리라![24]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거의 반사적으로 반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부분이 실은 위 인용문에 있다.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내가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이라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내가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바르게 사는 원칙(“형제간에 화목하라는 말씀으로 대표된)이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위 대목은 엄격하게는 다음과 같이 고쳐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분이 생각한대로 [내가] 살지 않으면.” 그러나 본문은 내가를 삭제하는 대신, ‘그분을 삭제하고, 그 자리에 내가를 넣었다. 이러한 무의식적 작업의 동기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를 지칭하는 단어를 그대로 넣으면 위 문장에서 아버지의 엄격성이 지나치게 드러나 억압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김현은 무의식적으로 일종의 자유간접화법의 형식을 빌어, 아버지가 직접 말하는 것인 양 내가를 넣음으로써, 억압적인 느낌을 없애고 아버지의 진솔한 육성이 토로되는 듯한 분위기를 입히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술의 효과는 단순한 동기의 실현 이상이다. 왜냐하면, 내가는 아들로서의 김현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 김현은 대명사의 문법적 모호성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말씀을 제것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엄격한 윤리는 무게가 가벼워져서 내가 추구하여 실행할 문제로 슬그머니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앞에서 본, 신성성이 성적인 것과 혼동됨으로써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낯설어져서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과정과 방법론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니, 그가 최초의 고향이 그에게 심어주었던 감각적 쾌락을 버려서 두 번째 고향이 그에게 요구한 사회적 윤리를 따른 것이 아니라, 혹은 거꾸로 그가 문학이라는 것을 통하여, 두 번째 고향의 요구에 저항하여 첫 번째 고향의 충동으로 돌아가려 한 것도 아니라, 두 번째 고향의 요구에 첫 번째 고향의 매력을 투사함으로써, 즉 사회적 윤리를 또 다른 감각적 쾌락의 대상(호기심과 발견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문학이 주는 즐거움을 궁극적으로 반성하는 삶으로 이월시켜 나갔다는 것이 확실한 사태처럼 드러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25]. 그리고 그것이 비평가 김현에 대한 온당한 이해에 훨씬 가까운 것이다. 그가 누구보다도 섬세한 감식안의 소유자였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감각적 쾌락에 그렇게 민감했으면서도 결코 독자의 열광을 도모하는 문학에 동의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쾌락의 달성을 방해하는 부정적 힘에 대한 인식을 앞세웠으며,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을 통해서, 세계가 개조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절실한 요구로서 변환시켰다. 그는 그 당위가 이미 실현되었다고 도취하지도 않았고, 그 당위가 실현되지 않는다고 울부짖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아도르노의 논지를 빌려 표현컨대 스스로 고통이 되는 문학을 좋아했고, 그 스스로 그런 고통이 되는 문학이고자 했다. 그의 언명을 직접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16) 감히 말하거니와 긍정적인 가짜 화해로 끝나는 고통의 제스처보다는 끝내 부정적인 행복스러운 고통을 우리는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의 제스처는 추하다.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불화를 가짜로 해소시키기 때문이다. 저급의 참여소설에 나타나는 저 가짜 소영웅들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러나 부정적인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행복스럽다. 자신이 고통이 됨으로써 그 부정적인 고통은 모든 거짓 화해와 거짓 고통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결국은 인간이 행복스럽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26].

 

스스로 고통이 되고자 하는 반성적 실천의 문학, 그것을 그는 한 때 유마(維摩)’의 세계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그의 문학적 자세가, 목포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것은 목포와의 싸움을 통해 목포의 삶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그의 복잡하고도 동시에 명료한 사유의 모험을 음미하는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석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홍정선, 연보-뜨거운 상징의 생애, 김현문학전집 제 16, 자료집, 문학과지성사, 1993, 434; 김현, 두꺼운 삶과 얇은 삶, 두꺼운 삶과 얇은 삶, 나남, 1986, 189~90; 김현 문학전집 제 14우리 시대의 문학 / 두꺼운 삶과 얇은 삶, 문학과지성사, 1992(이하, 전집 14으로 약칭), 366

2) 홍정선, 같은 책, 같은 면.

3) 두꺼운 삶과 얇은 삶, 나남, 189~90; 전집 14366.

4) 김현, 한국문학의 위상, 1, 왜 문학은 되풀이 문제되는가, 문학과지성사, 1976, 7; 김현문학전집 제 1, 한국문학의 위상 / 문학사회학, 문학과지성사, 1991(이하 전집 1으로 약칭), 39

5) 김인환, 글쓰기의 지형학, 상상력과 원근법, 문학과지성사, 1993, 379

6) 예술적 체험의 의미, 두꺼운 삶과 얇은 삶, 나남, 134 ; 전집 14317~18.

 

7) 한국문학의 위상, 7~8; 전집 139.

8) 한국문학의 위상, 7; 전집 139.

9) 한국문학의 위상, 8; 전집 139~40.

10) 한국문학의 위상, 2,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21~22; 전집 150.

11) 정과리, 못 다 쓴 해설, 정과리편, 김현문학선, 전체에 대한 통찰, 나남, 1990, 477

12) 아마도 섬세함에 대한 과도한 취미가 있는 사람은, 소년 김현이 노점 책방에서 산 책을 읽을 때에, “지루하고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는 지문地文은 성큼성큼 뛰어넘고, 멋진 대화같이 느껴진 것만을 읽어가는 괴상한 독법으로 읽었다고 말하면서, ‘지문에 한자를 병기한 것을 보고 호기심이 당길 것이다. ‘지문이라는 단어의 활용 희박성 때문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다른 무의식적 기도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의 지문의 원 뜻이 희곡에서, 해설과 대사를 뺀 나머지 부분의 글. 인물의 동작, 표정, 심리, 말투 따위를 지시하거나 서술한다.”(표준국어대사전)임은 평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다 알고 있겠지만, 그 한자어의 글자에 대해서는 약간 뜻밖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때문에 사전을 찾아 보고는, 그 단어가, ‘지리학에서 산천·구릉·지택 등 대지의 온갖 모양혹은 지문학(자연지리학의 옛말)의 준말이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 김현의 무의식은, 그 두가지 뜻을 뒤섞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지문은 그의 책읽기에서 체감의 바탕 공간, 즉 풍경의 역할을 하게 되어, 그가 성큼성큼 뛰어넘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책읽기의 추체험적 활동이 그 바탕의 풍광 속을 성큼성큼 뛰어다녔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어른 김현의 무의식은 그러니까, 어린 시절의 자신이 책을 성기게 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핍진하게 읽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3) 한국문학의 위상5, 문학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57~58; 전집 178~79

14) 한국문학의 위상전체를 통틀어 성경이라는 단어는 이 대목에서만 등장한다.

15) 그러니, 왜 보들레르Baudelaire독자에게에서 위선자 독자여, 내 동류여!”라고 불렀는지를 독자는 이해할 수 있으리라.. - Charles BAUDELAIRE, Œuvres Complètes I - texte établi, présenté et annoté par Claude Pichois (coll.: Pléiade), Paris : Gallimard, 1975, p.8; 샤를르, 보들레르, 악의 꽃, 윤영애 역, 서울 : 문학과지성사, 2004, 37.

16)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이윤기 역, 서울 : 열린책들, 1986.

17) 김현 선생이 사적인 자리에서 내게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그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간 날, 아버지의 분노를 사서, 섬돌에 밤새도록 꿇어앉는 벌을 받았다. 어쨌든 그는 그 체벌을 통해서 사회 속에서의 자신의 위상을 지키게 되었다.

18) 홍정선의 사석에서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 김현이 싸움꾼이었다는 건, 홍정선이 이국선 목사 부부에게서 자주 들었던 말이다.

19) 김현문학전집 제 15, 행복한 책읽기 / 문학 단평 모음, 문학과지성사, 1993(이하, 전집 15로 약칭), 45~46.

20) 한국문학의 위상, 2,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1; 전집 150.

21) 프로이트 S. Freud,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Psychopathologie de la vie quotidienne[1901], Dr. S. Jankélévitch1922년 번역본, Éditions Payot, 1975, p.98.

22) 전집 1546

23) 한국문학의 위상, 2,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4~25; 전집 153.

24)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두꺼운 삶과 얇은 삶, 나남 간, 194; 전집 14369.

25) 여기까지 오면, 그가 비평가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굳히면서 잇달아 펴낸, 두 권의 평론집의 제목도 지금까지의 이해에 맞추어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상상력과 인간(일지사, 1973)사회와 윤리(일지사, 1974), 그의 두 고향체험의 계통발생적 되풀이가 아닐까?

26) 한국문학의 위상, 3, 문학은 무엇에 대하여 고통하는가, 31; 전집 157~58.